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산업자원부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한국 노사문제의 해법을 찾았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이 말하는 그 ‘해법’이란 게 뭘까? 그건 바로 ‘유한킴벌리 문국현사장의 경영모델’을 의미한 것이다.
문국현 사장은 74년 유한킴벌리에 평사원으로 입사, 95년 대표이사으로 취임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파업회사를 초일류기업으로
문사장이 CEO로 취임한 이후 유한킴벌리는 지난 10년간 눈부시게 성장했다.
1996년 매출 2,077억원에 순이익 143억원 정도였던 이 회사가 지난해 거둔 실적은 매출 7,036억원, 순이익 904억원.
직원수가 1,601명인 것을 감안하면 1인당 약 4억4천만원의 물건을 팔아 자신의 인건비, 세금 등을 제하고도 약 5천6백만원씩 이익을 남긴 셈이다. 특히, 이 회사는 현재 부채가 사실상 제로(0)에 가까울 정도로 탄탄하다.
그러나 과거의 유한킴벌리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노사분규의 회사’였다.
그만큼 이 회사는 파업이 많았고 지난 95, 96년에는 공장폐쇄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회사의 부채도 매년 급증, 95년에는 952억원에 이르렀다.
이런 회사가 어떻게 지난해 Hewitt, AWSJ, 매일경제신문 등 국내외 언론사들이 선정한 ‘아시아·한국 최고의 직장’에 오를 수 있었을까?
문국현 사장은 “유한킴벌리의 변화의 원천은 바로 직원이었다”고 고백한다.
“CEO는 직원들을 종업원이 아닌 ‘파트너’로 대우하고 그들에게 ‘주인의식’을 불어넣는 교육을 해야합니다. 모든 정보를 직원들과 공유하고 이들과 함께 ‘회사의 공동비전’을 설계해 나가는 거죠.”

공부 하느니 차라리 ‘파업’?
문 사장이 사실상 처음 회사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1년간의 미국 유학(경영수업)을 다녀온 이듬해였다.
당시 문 사장은 미국에서 배웠던 ‘기업혁신 마인드’를 회사에 심으려 했고 기존 방식을 답습하려던 직원들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1988년 그는 ‘유한킴벌리 2000년 비전’을 만들었고 직원들과 ‘이 비전의 달성을 위해 노사가 함께 노력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문 사장은 1991년 신탄진에 제3공장을 건립, 93년부터 가동하면서 ‘그의 비전’을 실천해나갔다.
이 때 탄생된 게 ‘4조2교대 근무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직원들이 4일간 12시간씩 일하고 이후 4일 동안은 연속해서 쉬는 방식이다. 그러나 문사장은 4일간의 휴일중 하루는 무조건 직원교육을 받도록 했다.
이 방식은 그의 예상대로 제3공장에 커다란 혁신을 불러왔다.
“4조를 운영하니 기계를 24시간 가동할 수 있었고 시간당 생산량이 무려 3만2천개까지 올라갔습니다. 직원들의 안전사고도 현격하게 줄어들었고 남는 시간은 영어, 인터넷 등의 교육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기존의 1, 2공장 직원들이 안정된 생활에 위협을 느끼고 반발하기 시작했다. 노사분규가 발생했고 이는 다시 파업으로 이어졌으며 공장폐쇄라는 극단적 상황에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문 사장은 직원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알고보니 당시 1,2공장 직원들이 자신들도 (3공장 직원처럼) 교육을 받게 될까봐 두려워했던 거”라며 “이 때 처음로 직원들이 얼마나 공부를 싫어하는 지 알게 됐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직원들의 기를 살려라
당시 그는 직원들에게 ‘평생교육을 통한 직원 비전’을 제시하는 한편, 평생 직장을 약속함으로써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문 사장은 이후 직원들의 아이디어와 잠재적 능력을 발굴하기 위해 ‘열린 유한킴벌리’를 만들어 왔다.
직원들의 기를 살려주자 아이디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이 회사의 직원들이 제안한 각종 아이디어는 3천건도 넘는다. 하루에 10개에 가까운 아이디어가 나온 셈이다.
문 사장은 “인건비는 아무리 많아도 회사 전체비용의 15∼20%밖에 안된다”며 “경쟁력 있는 기업은 인건비로 승부하기 보다는 ‘기업혁신’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옥석기자·yangok@kfsb.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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