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아지랑이가 따사로운 햇살 따라 눈앞을 아른거린다. 봄 훈풍이 얼굴을 훑으면 엷은 졸음이 밀려오지만 성가시진 않다. 바투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남녘. 구례의 산수유 마을은 올해도 성대하게 꽃 축제를 펼쳤다. 중국 산동에서 시집온 새댁이 한그루 가져와 퍼진 산수유는 이제 관광객들을 유치하는데 큰 몫을 차지한다. 천년이 넘었다는 시목(계척마을)이 구례 전역을 노랗게 수놓고 있다.
아직은 일러서 만개하지 않은 봄 하루, 산수유마을에 발길을 내딛는다. 굵어질 대로 굵어진 산수유나무 사이로 앙증맞은 꽃이 다닥다닥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저 산수유가 많다는 이유로 유명해진 마을. 지리산 온천이 들어서고 나서 더욱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별 느낌 없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전망대까지 오른다.
계곡물은 우렁차서 더욱 힘이 솟구치고, 버들강아지도 이제는 꽃이 만개했다. 따사로운 햇살에 청보리 색깔이 더 진해지면서, 다소 느긋한 마음이 돼 마을을 비껴 매천사당에 잠시 점을 찍고 곽재구 시인의 “산수유 꽃 필 무렵”을 떠올리면서 이내 화엄사로 발길을 옮긴다.
꽃이 피어서/산에 갔지요/구름 밖에/길을 삼십 리/그리워서/눈 감으면/산수유 꽃/섧게 피는/꽃길 칠십 리.
일주문을 지나쳐 경내로 들어선다. 화엄사(www.hwaeomsa.org)는 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했으며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이름 붙였다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고찰이다.
이곳이 대찰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보물은 많지만 확연히 보여주는 것은 역시 각황전이다. 하지만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잠시 경내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뒤에 있는 구층암을 찾는다. 많이 걷지도 않았다. 대나무 숲 사이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경내에 닿고 자그마한 석탑과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층암은 유물로 보아 신라 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찰 이름으로 보아 본래 구층 석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구층암에는 작은 불상 1,000구가 봉안된 천불보전과 수세전, 그리고 두 채의 요사채가 있다. 천불보전에 있는 토끼와 거북 나뭇조각은 설화를 묘사했다고 전한다.
또한 요사채 곳곳에 조각된 사자상과 코끼리상은 다른 암자에서 느낄 수 없는 서민적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무엇보다 구층암에서 가장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승방을 지탱하고 있는 모과나무 기둥이다. 대패질 하지 않은 나뭇가지의 흔적, 나무 결과 옹이까지도 그대로 표현돼 있다. 자연스러운 건축형태에 반해 눈길이 떠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모과나무를 ‘호성과(護聖果)’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호성과’를 풀어보면 ‘성인을 보호한 열매’라고 할 수 있는데, 옛날 공덕을 많이 쌓은 큰스님이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 커다란 뱀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갑자기 외나무다리 바로 옆에서 자라고 있던 모과나무의 열매가 툭 떨어지더니 구렁이의 머리를 정확히 맞혔다. 놀란 독사는 다리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스님은 안전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모과나무 기둥은 자연스러운 건축 덕에 고찰 분위기를 더욱 느끼게 한다. 행여 이 기둥을 만든 목수가 그런 설화를 알고 있는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천불보전 앞의 살아 있는 모과나무를 보면서 미소 짓는다.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말을 되새기게 한다. 여러 번 찾은 화엄사지만 부속암자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암자를 뒤로 하고 연기암(www.yeongiam.org)을 찾아 올라간다. 성삼재 휴게소가 생기기전에는 지리산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으레 코스로 찾았던 등산로 길. 걸어야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했는데 의외로 번듯한 찻길이 숨어 있다. 4km 정도의 거리. 걷기엔 만만찮은 길이지만 울창한 숲길에서 내뿜는 기운이 청신하다. 연기암은 550고지로서 화엄사 산내암자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연기암을 창건한 것은 인도의 승려 연기조사다. 그는 경주 황룡사에서 경을 설하다가 선몽을 얻은 후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 지리산에 들어와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했다.
연기조사가 맨 처음 자리 잡은 곳이 바로 노고단 바로 밑인 연기암이었다. 그 후 화엄사를 창건하고 다시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등 지리산 곳곳에 사찰을 열어 화엄사상을 널리 폈다.
하지만 이 암자는 임진왜란 때 잿더미로 변했고 400여 년 동안 칡넝쿨과 가시덤불에 방치돼왔다. 이후 1989년 대적광전, 문수전, 관음전, 적멸당, 원응당, 일맥당, 지석당 등을 건립했다.
이 암자를 복원할 때 쌍조문의 암막새와 연꽃문양의 숫막새 기타 청자편, 백자편등이 출토됐는데, 이중에서 특히 쌍오문(雙鳥紋)의 암막새는 남원 만복사지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유사해 그 연대를 통일 신라 말 이상으로 추정하게 됐다.
대부분의 화엄사 소속암자들의 창건이 조선시대 후반기인 18∼19세기인 점에 비추어 볼 때 연기암의 창건은 화엄사의 창건과 관련해 그 연대가 통일신라 말 이전으로까지 추정하고 있다.
원고를 쓰면서 곽재구 시인의 “연기암에 올라-정태춘에게”라는 시구를 찾아냈다.

해지는 섬진강을 보았습니다/허리 굽은 구례 사람들/등불 하나씩 들고/강변 논밭에 주저앉고 노을이 느린 걸음의/강물을 따라 나서는 동안/어둠이 깊은 포옹으로/산을 껴안는 것을 보았습니다/깊이 사랑했으므로/그들의 뼈는 소리없이 부딪치다가/산 계곡을 타고 올라/하늘의 시린 강이 됐습니다/연기암에 올라/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사랑했으나 쓸쓸히 헤어진/사람들의 눈망울들/들판 멀리 지천으로 깔렸습니다/하룻밤을 걷고/열흘 밤을 걷고/천 날을 걸어도 끝나지 않는 길들이/별들 사이 펼쳐져 있습니다.

■별미집과 숙박 : 화엄사 지구를 찾으면 된다. 지리산대통밥(061-783-0997-8), 지리산식당(061-782-4054), 그 옛날 산채집(061-782-4439) 등이 소문나 있다. 구례구역 쪽에는 참게탕을 하는 곳이 여럿 있다. 혹은 남원읍내의 현식당(063-626-5163)의 추어탕 맛이 일미다. 또 한군데는 우소보소(063-633-7484, 남원시 향교동)다.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밥상이 기분을 좋게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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