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죠. 초등학교 졸업하고 먹고 살려고 들어간 곳이 은수저공방이더라고요.”
대영공방 이윤희 대표(서울은수저협동조합 이사장)는 은수저 및 은세공 분야에만 40여년을 종사한 국내 은수저 분야의 최고 명인. 1960년 우연하게 은수저공방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은수저 만들기에만 매달려 왔다.
“처음 15년 동안 공방에서 은수저를 만들었습니다. 허드레 일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기술을 배워나갔죠. 그렇게 15년이 지나니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더군요.”
이 대표는 75년 독립해 자신의 공장을 설립했다. 따로 직원도 두지 않고 자신이 직접 은수저를 만들어 가방에 넣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은수저를 팔았다.
“공장에서 은수저만 만들다가 직접 장사를 하려니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쑥스러워서 가게 문 앞만 기웃거리다가 문전박대 당하기 일수였습니다.”
이 대표는 그렇게 며칠을 머뭇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결국 돈이 다 떨어지게 됐고, 돌아갈 차비라도 벌 생각에 용기를 내어 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돈이 떨어지니 ‘에라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눈 앞에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은수저를 팔았습니다.”
이 대표는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쑥스럽기만 하다며 미소를 지었다. 은수저 분야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했지만 막상 물건을 팔려니 막막하기만 했던 이 대표도 뛰어난 품질을 앞세워 조금씩 판로를 넓혀 나갔다.
이 대표는 “꼼꼼하게 정성을 다해 만든 저의 제품을 사람들이 조금씩 알아주기 시작했다”며 “그러다가 김승희 국민대 금속공예과 교수를 알게 됐고 김 교수의 작품작업을 도와주면서 제품이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의 은수저는 각종 공예품 경진대회를 휩쓸면서 각계의 대호평을 받았다. 규모가 커지면서 지난 94년에는 1억원이 넘는 이탈리아제 중저주파 연속주조기를 들여와 은소재 제품의 품질을 더욱 높이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94년에 첨단 기계를 들여왔는데, 지금도 국내에서 사용하는 곳은 저희 한 곳밖에 없습니다. 업계 자체가 영세하다보니 저런 고가의 기계를 들여 올만한 곳이 전무합니다. 또 전반적으로 은수저의 수요가 줄다보니 요새 더욱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95년경에만 해도 500곳이 넘던 은수저 공방은 이제 50여곳에 불과하다. 10년새 10분의 1로 줄어든 것. 국내 은수저 소비가 예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다보니 영세한 업체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대영공방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품질을 인정받아 영국의 유명 은세공업체에 손거울과 종이칼 등을 수출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은 은수저와 은세공품 뿐만 아니라 이 대표가 개발한 은마사지기계를 조금씩 판매하고 있다.
이 대표는 “우연히 알고 지내고 있던 여성분에게 피부에 좋은 은을 이용한 마사지기계를 만들어주겠노라고 농담삼아 얘기한 게 시작이었다”며 “엉성하고 어설프게 하나씩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해왔는데 주변에서 상품화를 권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 대표는 실용신안을 두개나 획득하면서 주름살, 기미, 주근깨 등에 효과가 좋은 은마사지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올 3월부터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한 마사지기는 뛰어난 피부미용 효과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 벌써 5백여개가 판매됐다.
이 대표는 “식약청에 의료기기로 정식 등록을 하려해도 2억이 넘는 임상실험 비용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며 “지금 생각하면 괜한 짓을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고 멋적게 웃었다.
평생을 은수저 밖에 모르고 살아온 이 대표는 은수저 분야도 당당한 전통 공예로 정부와 학계의 인정을 받았으면 한다는 소망을 밝혔다. 이대로 가다간 국내 은수저 제작의 명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매우 크다.
“젊은 사람들은 이제 이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아들들이 가업을 잇겠다고 나서주니 기특하기만 합니다.”
대영공방에는 현재 이 대표의 아들 2명이 가업을 잇기 위해 은수저 제작과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이 대표는 “우리 같은 장인들은 나라에서 기술을 인정해 주면 밥을 굶더라도 견딜 수 있다”며 정부의 지원과 관심을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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