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後漢) 안제(安帝:106-125) 때 있었던 일이다. 고급관료 양진(楊震)은 협서성(陝西省)출신이며 학문이 깊고 청렴 결백한 인물로서 이름이 높아 당시의 사람들이 ‘관서지 공자’(關西의 孔子)로 존경했다. 그것은 양진의 평소 언행이 정직하고 맑으며 명망이 그 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한 때 형주(荊州)의 자사(刺史:감찰관)로 있을 때 왕밀(王密)이라는 자가 눈에 띄게 일을 잘해서 창읍(昌邑)의 현령(縣令)으로 등용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양진이 동래군(東萊郡)의 태수(太守)에 임명돼 부임하는 도중에 창읍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그런데 이날 밤 늦게 창읍 현령 왕밀이 아무도 모르게 양진 태수와 얘기를 하다가 소매에서 황금을 양진에 내밀었다. 양진이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것은 훌륭한 공직자가 돼 달라는 것이며, 이런 것이 아니다”
“태수님, 이것은 단지 지난날의 은혜에 보답코자 한 것 뿐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보거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양진이 왕밀을 꾸짖었다.
“무슨 소리!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天知, 地知, 我知, 汝知=註:유명한 ‘四知’의 고사) 알고 있다. 어디서 배운 못된 버릇인가”
왕밀은 양진 태수 앞에 엎드려 사죄하고 숙소를 물러났다.
얼마 후 조정(朝廷)에 일대 부정부패 사건이 발생했다. 안제(安帝)가 자신의 유모를 위해 거창한 저택을 세웠는데 규모가 크고 화려하고 정교하기가 극치에 이르고 저택내의 山水 풍경도 아름다워 막대한 국고가 투자되고 희귀한 물자가 소비됐다.
그런데 문제는 그 뿐이 아니고 유모와 그 딸이 안제의 호의(好意)를 등에 업고 일부의 환관(宦官)과 결탁해 정치에까지 관여하고 간신배를 이용해 양심적인 중신(重臣)을 모함하고 뇌물을 챙겼다.
사태가 커지고 부정부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가만이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 양진(楊震)이었다. 양진은 황제에 상소해 유모 일당의 부정부패 전모를 폭로했다.
“검은 것과 흰 것의 분간이 아니되고 청수와 탁수가 구별이 아니되며 돈이 만사를 결정하고 조정의 내외를 불문하고 부정과 오직(汚職)이 나라 일을 결정하니 아니 됩니다…”
양진의 지적을 받는 무리는 양진의 존재가 눈 위의 혹이므로 황제에게 양진을 집중 모략했다. 사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황제는 양진을 파면하고 고향으로 쫓아냈다.
양진은 낙양(洛陽)의 역두(驛頭)에서 환송 나온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나는 대관(大官)이라면서 간신들의 악행을 바로 잡지 못한 책임을 통감, 그 책임을 지고…” 하더니 주머니에서 독약을 먹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出典:<後漢書>) 생각해 보자. 죽음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공직자는 최소한 공직상의 책임은 질 줄 알아야 한다. 책임 안지는 공직자가 많은 세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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