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 전 중소기업중앙회회장이 중소기업문제 전반에 관한 NGO역할을 하겠다며 ‘중소기업포럼’을 창설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박 회장은 중소기업포럼에서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정책 등 모든 부문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해 올바른 정책진단을 하고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물론 포럼이 제시하는 정책대안이 최선이 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중소기업에 대한 국민적 인식제고와 정부와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포럼창설 의의를 밝혔다. 박 회장은 또 “흩어져 있는 중소기업의 힘을 결집시켜 중소기업중앙회의 활동에 보태주는 데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을 만나 중소기업포럼 창설의 배경과 역할을 들어봤다.

“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우던 초등학교시절, 담임선생님 자취방에 놀러갔는데 하얀 쌀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나도 커서 선생님이 되어야지’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주변의 모두가 가난했기에 쌀밥을 드시는 선생님은 당시 어린 저의 눈엔 최고의 부자로 보였습니다.”
박상희 미주금속(주) 회장(중소기업포럼 대표)은 집안의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상고에 입학하고 그 당시 최고의 직장이라는 국민은행에 들어갔다. 은행에서 기업을 상대로 일을 하면서 큰 기업을 경영하겠다는 꿈도 키웠다.
올해 54세인 박 회장이 겪은 지난 10여 년간의 시간은 스스로도 밝히듯 “개인적으로 한 30년은 살아야 경험할만한 것들을 경험했다 ”고 말한다.
그는 지난 1995년, 만43세이던 해에 중소기업중앙회 제18대회장에 당선돼 역대 최연소 회장의 기록을 세웠다. 그 때까지 ‘박상희’라는 이름 석자는 경제계에 전혀 생소했던 이름이었다.

40대 경제단체장 당선

지금까지 40대에 경제단체장을 맡은 예는 다른 단체에서도 없던 일이다. 젊은 수장을 맞이한 중소기업계는 과연 300만 중소기업의 대변역할을 잘 해 낼 수 있을지 기대 반 우려 반의 호기심을 보였다.
반대로 젊은 중앙회회장을 파트너로 모든 행사에 함께해야했던 다른 경제단체장들은 평균연령이 60대 후반이었다. 흡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한 것 같았다.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정작 다른 경제단체장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박 회장의 나이가 아니라 직설화법을 통해 연일 터져 나오는 “재벌개혁”이라는 쓴 소리였다.
그의 취임 일성은 이랬다.
“중소기업계에도 이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그동안 중소기업을 지원하겠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책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현장의 목소리인 실물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이 생산될 수 없었다.”
그는 또 재벌개혁에 목소리를 높였다.
“재벌의 순기능적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우리가 통한의 IMF체제를 경험했던 것은 재벌의 무분별한 투자와 시장잠식이 한 원인이다. 재벌개혁 없이 산업구조개선이나 중소기업중심의 산업재편도 어렵다.”
그 때를 회고하며 박 회장은 “중소기업은 열 번 목소리를 높여도 대기업의 한번만 못하기 때문에 자연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재벌개혁은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구조 재편이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고 말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법이 통하는 사회라야 하지만 힘의 논리가 냉혹히 적용되는 기업세계에서 중소기업을 대변한다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박 회장은 3년의 임기를 마치고 1998년 재선에 성공, 또 다시 제19대 중앙회회장에 취임했다. 지난 3년간의 임기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회원 조합의 평가가 내려진 것이다.
“당시는 IMF를 겪으며 모두가 어려워하던 시기였습니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리더십의 공백을 우려한 중소기업인들의 의지가 표현된 것으로 믿었습니다. 막중한 사명감을 느끼며 중소기업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다졌습니다.”
박 회장은 3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멋진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권은 각 당의 묘한 역학구도에서 여론의 주목을 받던 박 회장의 상품성에 눈독을 들였다. 각 당으로부터 끊임없는 러브콜이 이어졌고 결국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으로 민주당에 입당하게 된다. 2000년에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배지를 단 박 회장은 국회예산결산특별위와 정무위원회 및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박 회장은 중앙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기업 한 두개는 희생할 각오로 중소기업을 위해 일하겠다고 밝혔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정치권에 입문하고 경영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젊음을 몽땅 바쳐 맨손으로 일군 자식 같던 건설회사는 워크아웃에 들어가 채권은행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중소기업 목소리 포럼통해 전파

박 회장은 중앙회회장과 국회의원 겸직에 대해 언론과 비판세력의 압력에 못 이겨 결국 2000년 9월, 중앙회회장에서 물러났다.
“법적으로도 하등 문제가 없어 대통령도 겸직을 약속하고 입당을 요청했는데 도덕성을 내세운 여론에 못 이겨 중앙회회장을 사퇴했습니다. 국회의원으로서 중소기업을 위해 할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박 회장은 겸직에 대한 이유로 “중앙회 회장으로서 국회의원을 겸직하면 중소기업 현안을 풀어나가기가 수월하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박 회장은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한두 가지 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고 했다. 중앙회 회장 시절에는 하루 저녁을 세 번 먹는다고 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을 만났다.
“지금 정부의 중소기업정책이나 대기업의 행태를 보면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중소기업포럼을 통해 중소기업계의 목소리를 모으고 정부와 중앙회에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박 회장은 포럼의 활동은 철저히 중소기업을 위한 NGO활동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중소기업을 위한 시책은 어느 국가보다 잘돼 있지만 문제는 실천이 잘 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포럼이 정책의 고객인 중소기업 입장에서 평가하고 감시해 잘한 것은 칭찬을 통해 더욱 긍정적 시너지효과를 높이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중소기업인이 정책의 감시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언론사와 이익단체 등에서 운영하는 유사 포럼이 많이 있지만 자신의 노선을 대변하거나 직간접적으로 정부와 연관돼 있어 제 목소리를 다 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중소기업의 입지는 스스로 확보해야지 누가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중소기업계가 각자 다른 소리를 내지 말고 의견을 모아 한 소리를 낼 때 힘은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중소기업중앙회를 중심으로 중소기업계는 하나가 돼야합니다.”
박 회장은 중앙회가 잘하는 것이 있으면 공개적으로 알리고 칭찬하며 비록 잘 못하는 것이 있을 때라도 폭로하고 회초리만 들려 하지 말고 똑 바로 가도록 조용히 일러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소기업계는 막중한 역할을 하는 중앙회회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박 회장은 “요즘 시민단체로부터 고용허가제 도입 등으로 집중 성토를 당하고 있는 중앙회를 볼 때 도저히 앉아서 구경만 할 수 없었다”면서 “국가경제와 전체 중소기업발전을 위해 옳은 정책방향을 잡고 활동을 하는데도 외부에서 왜곡된 시선으로 공격을 한다면 당연히 중소기업계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기중앙회 중심 하나돼야

그러나 박 회장은 중소기업포럼이 중앙회의 부속위원회처럼 항상 듣기 좋은 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잘 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잘 못한 것은 반드시 고쳐지도록 중소기업현장의 목소리를 올바로 전달하는 기능을 충실히 하겠다고 밝혔다.
“21세기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선진경제를 이루기위해서는 우리경제의 뿌리인 중소기업이 중심이 되는 산업구조로 개편되어야 하며 대·중소기업간의 진정한 협력관계 구축과 공정한 시장경제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반칙을 일삼는 재벌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메아리에 그쳤습니다. 이제 포럼을 통해 중소기업계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박 회장은 맺는말로 “중소기업이 국가발전의 주역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신바람 나는 중소기업시대를 열어 가는데 포럼이 심부름꾼이 되겠다”고 각오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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