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이다. 눈과 얼음과 바람의 계절. 숱한 추억거리를 남긴 채 2002년은 저만큼 물러갔고, 남녘에서는 어느 새 봄꽃이 봉오리를 맺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렇듯 계절의 순환은 어김없다.
해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매년 이맘때쯤이면 묘한 설레임과 조급함과 새로운 각오가 교차한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되었다는 감흥 때문이리라. 찬바람이 무시로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새해에 거는 기대로 저마다의 마음은 하늘만큼 높다.
맵찬 바람이 창문을 덜컹거리게 하는 초저녁이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이 흘러나온다. 이 아늑함! 밖에서 돌아오면 이런 나만의 시간이 있어서 좋다.
어제 읽다 만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을 펼쳐든다. 가만히 숨죽여 읽고 있노라면 왠지 동심으로 돌아가듯 마음이 깨끗해진다. 평화와 안식과 행복이 흐르는 이 시간이 나는 참 좋다. 책을 읽음으로 해서 마음이 정화된다는 것은 분명 가치있고 행복한 경험이다. 현실 밖의 세계지만 좋은 책을 읽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혼탁으로 흐르는 현재의 삶을 반성하게도 된다. 세상을 감동이 번져나는 한편의 수필처럼 살 수는 없는 걸까?
겨울은 무엇보다도 송이송이 흩날리는 눈이 있어 그 운치를 더해준다. 영동지방에는 폭설이 내려 산마다 눈꽃이 만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이즈음이기도 하다.
흰눈 내리는 날 거리에 나서면 신비한 동화의 세계에 온 듯한 환상에 빠져들곤 한다. 세상이 흰눈 속에 파묻힌 풍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눈을 반기러 나온 청춘남녀들의 저 표정을 보라. 끼리끼리 어울려 눈싸움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면서 절로 행복감이 밀려든다.
눈은 깨끗함의 상징으로 통한다. 마음이 거칠고 때가 끼어 있는 사람이라도 눈을 보고 있으면 정결하고 온유한 사람이 된다.
누구나 눈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흰눈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찾아온다는데 그 묘미가 있다. 눈에 대한 기대심리가 크면 클수록 겨울이란 계절은 황홀하다.
작년 12월이 생각난다. 내가 사는 도시에도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함박눈이 하염없이 그리움처럼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흰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첫눈을 마냥 맞아보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자 눈송이가 사정없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 감촉이 부드럽다 못해 간지럽기조차 했다. 나는 눈을 뭉쳐 힘껏 팔매질을 했다. 눈은 나무둥치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거리는 점점 눈속에 묻혀 들어가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많은 양이 내리고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마다에는 눈꽃이 피어 절묘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자연은 얼핏 보기에 늘 그대로인 것 같지만 끊임없는 순환 과정을 통해 온갖 혜택을 내려주는 보배로운 존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을 찾아 떠나는 것이겠지. 자연과의 교감(交感)은 지친 영혼을 위무해 준다.
사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나무지만 흰눈이 얹힌 겨울 나무야말로 아름다움의 백미(百媚)라는 생각이 든다. 눈꽃 터널을 이룬 산에 가 보라.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설레임! 이런 만남을 통해 생의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눈 그친 뒤의 도시 풍경은 갑자기 술렁거린다. 추억을 담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공원주변은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벙어리 장감을 끼고 눈을 뭉치는 사람들 표정에서 겨울이 깊어감을 느낀다.
겨울 아침, 산에 가면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참 많다.
허옇게 얼어붙은 골자기의 엄음장 밑으로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겨울 산은 뭐니뭐니 해도 눈이 덮여 있어야 제 맛이 난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등산로를 따라 오르노라면 흐려 있던 마음이 어느새 밝아진다.
겨울 나무는 한마디로 강인한 생명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람해 뵌다. 봄에서 가을까지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다가 겨울이 오면 그간의 활동을 접고 조용히 속살을 갈무리하는 것도 나무의 특성이다. 더 튼실하고 훤칠한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 쉼없는 생명활동을 하는 것이다.
나무를 곁에 두고 있음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매일 나무와 대면하다 보면 불안정한 마음이 없어지고, 나무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흰눈 내리는 날, 따뜻한 외투를 걸치고 마냥 걸어보고 싶다. 저만큼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김 동 정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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