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은 필자와의 인연을 떨쳐내지 않으려는 듯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이곳을 찾게 한다. 백제 문화권 이외에도 익산에는 드라마 서동요 촬영지 세트장(익산시 신흥동, 여산면 원수리 산양마을)이나 영화 홀리데이, 거룩한 계보(성당면 와초리 성당초등학교 남성분교)의 세트장이 흩어져 있다. 시간 지나고 인기 못 누리면 잊혀지고 마는 드라마, 영화지만 세트장은 그대로 남아 관광객들의 발길을 부여잡는다. 또한 뱃길 끊긴지 오래된 곰개나루터에는 지금 ‘웅어회’가 한창이다.

지난해 우연히 익산을 거치면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을 만나게 됐다. 이번 여행에서는 익산을 속속 들여다보기 위해 시청의 문화해설사를 이틀간 동반했다. 하지만 해설사의 열정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역사에 대한 의구심을 더 심화돼 버렸다. 왜냐하면 그동안 익산 왕궁면 주변에 흩어진 여러 문화유적을 보면서 백제 무왕에 대한 실체를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동과 선화공주가 사랑을 나누던 장소라는 부여 궁남지를 찾았을 때도 “어찌 익산이 아닌 부여에서 그런 말이 떠도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가졌는데, 이번 익산 여행길에서는 “어쩌면 그 말이 맞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된 것이다.
역사의 수수께끼-백제 무왕
그 이유는 필자가 잘못알고 있는 역사지식 때문이다. 일단 서동이 익산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으로 얼마만큼은 정확성을 인정한다고 쳐도, 그가 태어났다는 마룡지는 자그마한 저수지에 불과하다. “저수지의 용을 통해 사람이 태어났다”는 믿기지 않은 사실은 둘째 치고, 왕궁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왕궁 터는 인근하고 있는 미륵사지보다는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수년에 걸쳐 발굴해낸 유물들의 숫자는 매우 작다. 게다가 무왕의 아들의 태를 묻은 것으로 알았던 태봉사는 전혀 다른 마한의 기준(箕準)의 아들 세 명이었던 것이다. 다른 것 다 차치하더라도 무왕이 이곳에 천도를 했다면 왜 아들인 의자왕은 부여에 머물다가 ‘삼천궁녀의 전설’을 남긴 채 백제의 마지막을 장식했단 말인가?
입에 침을 튀겨가면서 왕궁이 확실했다고 열변을 토하는 해설사의 말들은 의문이 꼬리를 물더니만, 머릿속은 깨진 조각을 맞추듯 추론이 생긴다. 추정컨대, 무왕(서동)이 익산 마룡지 부근의 마을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나 위덕왕(그의 동생인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해나가던 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으며, 적국인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을 하게 됐을까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것도 순전히 추정인데,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사실이고, 부여에서 등극을 하나 그의 출생성분등으로 힘이 없었을 것이고, 선화공주와도 정략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그래서 고향땅에 별궁을 지어 머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묘지라고 추정하는 쌍릉 또한 왜 합장묘가 아닌 서로 떨어져 봉분을 만들었는지. 도굴이 돼서 자료가 한점도 발굴되지 않았다는 고분에서도 생각은 꼬리를 물고 흩어진다.
바른 역사의 끝은 어디인가? 수년간 발굴하려 파놓은 흙무더기를 보면서 ‘바른 역사’는 마치 실타래가 엉키고 엉켜서 풀 수 없는 안개처럼 묘연해진다. 익산시에서 드라마 서동요 세트장을 유치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는 관계자의 말을 듣고 노력은 가상치만, 유행에 뒤밀려 가는 세트장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투자를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는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다. 예상했던 것처럼 서동요 촬영지 1,2 세트장(익산시 신흥동, 여산면 원수리 산양마을)은 풍광이나 관리 등으로 볼거리는 괜찮았지만 찾는 사람이 없어 썰렁하다.
영화촬영용 교도소 세트장
대신 영화 홀리데이, 거룩한 계보(성당면 와초리 성당초등학교 남성분교) 등을 찍었다는 국내 유일의 영화 촬영용 교도소 세트장은 지금도 영화촬영지로 꽤 인기를 누리고 있단다. 필자가 간 날에도 촬영이 있는지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돌아와 이곳을 배경으로 한 거룩한 계보라는 비디오를 빌려다 보면서 어떤 ‘씬’이 촬영됐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비록 황량한 교도소 세트장이지만 영화장면을 생각하면서 관람하면 재미가 배가 될 듯하다.
그래도 익산은 봄철 찾을만한 곳이다.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된 함열 마을 안쪽에서 만난 김안균(전북민속자료 제23호 함라면 함열리), 조해영(전북문화재자료 제121호) 가옥에서는 고가를 둘러싸고 있는 황토돌담이나 고가 화단에 심어 놓은 수령 오래된 정원수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출입이 통제돼 비록 담장너머 훔쳐본 장면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황등돌’로 유명한 황등 마을 안쪽 장터는 명맥을 잃어 가고 있지만 육회비빔밥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또한 나바위 성당(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일명 화산성당)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신부가 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첫발(1845년, 헌종 11년)을 내디딘 곳이라고 한다. 특히 조선시대엔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전하던 봉화대와 정부미를 실어 나르던 창고도 있었으며 지금도 바위벽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그 외 금강줄기의 명맥 잃어버린 나루터중 하나인 성당리 포구에 가면 은행나무(시도기념물 제109호)를 만날 수 있다. 딱히 볼거리는 없지만 웅어회 횟집 한집이 남아 번성했던 당시를 아스라이 떠올리게 한다.
이어 숭림사와 입점리 고분관, 웅포의 낙조를 연계했는데, 숭림사(웅포면 송천리) 가는 길목엔 있는 수령 오래된 벚나무에도 봄철이면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난다. 그 외에도 뱃길 끊긴지 오래된 곰개나루터에서는 어김없이 ‘웅어회’가 제철을 맞이하고 있다. 웅포 덕양정에 올라 말없이 유유히 흐르는 금강 물줄기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때는 봄바람이 칼바람처럼 가슴속을 후벼 팠다. 햇살 속으로 지나가 버린 옛 추억이 오래된 영화를 보듯 필름이 자르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붉게 물들은 금강 물줄기를 따라 삐그덕 삐그덕 나룻배 한척이 노를 젓는 듯한 환영이 봄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자가운전:경부고속도로(천안 JC)-천안, 논산간 고속도로 or 호남고속도로(회덕 JC)-익산IC/서해안 고속도로-동군산 IC-익산방면(27번국도 이용)
■별미집:익산은 볼거리보다는 먹거리를 부각시켜주고 싶은 곳이다. 푸짐하면서 값싼 음식점들은 매우 만족스럽다. 몇 년 만에 찾은 웅포의 금강식당(063-862-7000)은 여전히 여주인의 손맛이 빼어났음을 재확인한 곳이다. 그 주변에 있는 숭림사 거시기가든(063-861-4648)은 옻닭, 징거미 새우탕이 괜찮다. 그리고 익산나들목에서 왕궁면 가는 도로변에 있는 시골밥상(063-834-5757)의 쌈밥 집은 꼭 한번 들러봐도 좋을 곳이다. 근처의 사은가든(063-834-4044, 붕어찜)이 있고, 읍내의 본향 한정식(063-858-1588 익산시 신동)은 익산 특산물인 ‘마’를 이용한 퓨전 한정식을 내놓는데, 특히 마약밥, 마떡은 돌아와서도 내내 생각나게 한다. 북부시장 근처에 있는 북부 생선 家(063-843-1181) 또한 서민들이 즐겨 찾는 횟집이다. 그 외 황등면에는 진미식당(063-856-4422), 한일식당(063-856-4471), 시장비빔밥(063-858-6051)이 남아 육회비빔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서천집(063-856-5910)은 토속적인 백반을 즐길 수 있다.
■숙박정보:미륵산 자연학교(063-858-2580, 삼기면 연동리, www.mireuksan.com)에 펜션이 있고 그 외에는 모텔을 이용해야 한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