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 땅은 필자와는 인연이 깊은 곳인가 보다. 올 봄에는 ‘이제 그만 가야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도 또 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장흥까지 관광버스로 꼬박 6시간정도가 소요되는, 길고도 먼 정남진이다. 평소 때는 논스톱으로 달려가 본 적이 없는 곳이라 멀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탓에 엉덩이에 불이 날 즈음에서야 장흥 땅에 닿을 수 있었다.

장흥 땅에 접어들면서 만나게 되는 유치면. 이곳에는 신라 구산선문 중에서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이었던 보림사를 만날 수 있다. 으레 장흥을 벗어나 위로 올라갈 때 거쳐 가게 되는 동선인데, 그저 잠시 눈인사만 나누고 돌아가는 정도. 이번에는 장흥군의 유능한 관광해설사인 최예숙씨가 동행을 해주었다. 그녀의 장황한 설명은 막힘없이 이어졌고, 설명을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어렵다. 몇 가지 기억하자면, 이 절집은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왕의 권유를 받아 체징이 창건한 고찰로, 원래는 큰 대찰이었는데, 이후 6·25전쟁 때 소실돼 버렸다고 한다.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다가 불을 놓고 떠나갔다는 이야기다. 아직도 문화유산이 절집 군데군데 흩어져 옛 향기를 읽을 수 있다.
보림사 절집에는 일주문 대신 천왕문과 사천왕(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이 있었는데, 외호문(外護門)이라는 현판의 글귀가 특이하다. 또한 대적광전과 대웅보전 등이 가람이 흩어져 있고 대적광전 앞에는 쌍삼층석탑(국보 제44호) 및 석등이 딱 버티고 있다. 대적광전 내에는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이 모셔져 있다. 절 마당에는 비자나무나 차나무의 물이 섞여서 나온다는 약수터도 있다. 그 외 대웅보전 옆 건물 언덕으로 가면 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호), 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8호) 등 문화재가 눈길을 잡아끈다. 이것만이 아니다. 절집 동쪽으로 가면 요사채 한 채가 있고 비자나무와 야생차 향을 맡으며 숲길을 따라 가면 동부도(보물 제155호)를 만나게 된다. 관심 갖지 못한다면 지나치게 될 그런 장소다.
언덕에는 여러 부도가 흩어져 있는데, 묶은 동백꽃이 화사하게 꽃을 피워낸다. 그중 동부도는 여러 부도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졌으면서도 고려 전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부도는 아쉽지만 가지 못하고 말았는데, 다음에는 꼭 비자림과 차밭 산책을 해보련다. 어쨌든, 보림사에는 지방유형문화재도 12점이나 간직하고 있는 우리 불교문화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어 장흥읍내의 토요 상설시장을 찾는다. 매주 토요일마다 상설로 풍물장이 열리는데, 관광객을 위해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볼거리를 만들었다. ‘추억살리기’ 위해서 교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 한껏 노래를 불러 제키는 일이나 농악단, 소리 등등이 펼쳐진다. 장옥 한 편에는 할머니들이 쭉 모여 앉아 지역에서 나오는 나물 등, 난전을 펼쳐놓고 손님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할머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명찰 하나씩 차고 있는데, 이는 군청에서 선정해서 토요장날에는 1만원씩을 주고, 물건 값은 고스란히 쌈짓돈이 된다는 것이다. 크지는 않지만 주변에 저렴한 가격에 국산 소고기를 팔고 있어서 여럿 식당 안은 사람들로 바글댄다. 완주 산내면의 우시장 형태를 띠고 있다.
장터를 비껴서 관산 쪽으로 가면 장흥의 유명한 천관산을 만나게 되는데, 그동안 알고 있던 장천제나 천관산 문학공원 이외에도 대규모 동백군락지가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천관산 자연휴양림 임도길 중간 즈음에 있었는데, 필자도 두어 번이나 이 길을 지나쳤음에도 관심을 갖지 못했던 곳이다. 추정컨대, 국내 최대의 군락지라는 것이다. 이미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고 아직까지 산책로가 마련되지 않은 불모지와 같은 곳이지만 탐스럽게 피어난 동백꽃에 흠뻑 취할 수밖에 없다.
이곳을 나와 장천제 입구에 들러 칡차 할머니를 만났고, 여전히 진한 차 한 잔으로 갈증을 해소한다. 물이 불어난 천관산 계곡은 시원하고 군데군데 진달래가 피어나 봄 향연에 폭 취하게 한다. 탑산사 가는 길목에 있는 천관산 문학공원 오르는 길목에도 벚꽃이 피기 시작하고, 춘란이 피어나 진한 향을 피워낸다.
이어 잠시 수문 쪽으로 가기 전에 만나는 여닫이 바닷가에서 한승원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한승원 작가는 장흥의 내로라하는 문인인데, 원래는 신상리 포구 쪽에 시비가 있었는데, 거처를 안양 면으로 옮기면서 ‘해산토굴’이라는 작업실을 만들었다. 운 좋게 작가를 눈앞에 두고, 종려나무 가로수가 펼쳐지는 여닫이 바닷길 산책로를 따라 그의 시와 작품 세계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작가의 작품 세계는 아직 입문하지 못했지만, 그가 읽어 내려가면서 설명해주는 글귀는 질펀하면서도 고향의 바다 내음이 가득하다. 작가와 함께 질펀한 저녁식사 판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것으로 장흥 여행을 끝낼 수 없는 일. 장흥 한재의 할미꽃 군락지가 있고, 회진포구에서 삭금을 잇는 길목에 있는 천년학 세트장은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다. 임권택 감독이 만든 천년학은 시사회를 할 예정(이 기사가 나간 후에는 시사회가 끝난 상황일 듯). 천년학 세트장에서는 약간 멀지만 군에서는 대규모 유채꽃을 심어 두었다. 멀지 않은 진목마을은 이청준 선생의 생가지. 마을 안쪽에 있는 옛집은 작가의 작품과 사진 등을 방안에 걸어 두고, 분위기를 조성해 놓았다. 그리고 장흥의 정남진으로 알려진 신동 바닷가 근처에도 샛노란 유채 꽃밭이 조성돼 천관산과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비릿한 바다사이로 정 많고 인심 좋은 사람들의 향기가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찾아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서해안고속도로로 종착지인 목포IC에서 영산강 하구언 방조제 길을 건너 국도 2호선을 타고 계속 달리면 장흥으로 이어진다. 또는 호남고속도로 이용해 동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국도를 따라 와도 된다.
■추천 별미집: 이번 여행길에 알게 된 맛집으로는 토요시장내에 있는 한우집, 그리고 여닫이 해변에 있는 여다지회마을(061-862-1041)에서는 싱싱한 키조개와 새조개 요리를, 회진포구에 있는 갯바위 회타운(061-867-8211)에서는 싱싱한 자연산 회를 즐길 수 있다. 특히 갯바위집은 자연산이라 싱싱함 정도가 대단한 편. 그 외 삭금마을의 삭금횟집(061-867-5461)은 된장물회가, 바지락회로 소문난 맛집은 바다하우스(061-862-1021)가 수문해수욕장가에 있다. 또 장흥읍내에 있는 명동가든(061-863-8797)의 쌈밥이 부담 없고 읍내의 신녹원관(061-863-6622)이 괜찮으며 호텔 밑에 있는 명동횟집(061-863-7772)가 괜찮다. 옥섬파크 바로 밑에 씨엔문(061-862-2333) 바닷가 카페도 운치 있고 펜션도 있다.
■숙박 정보:수문쪽의 옥섬워터파크(061-862-2100)는 풍광 좋은 바닷가 옆에 들어선 워터파크로 24시 찜질방도 있다. 또는 읍내의 진송관광호텔(061-864-7775-6), 리버스 모텔(061-864-9200) 등이나 천관산 자연휴양림 산막을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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