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집안시내를 거쳐 ‘집안시 박물관’을 스쳐 지나간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당시 문을 닫아 걸어 두었다. 그리고 혼강을 따라서 가면 환도산성이 나오는데, 이 환도산성은 국내성에 적이 침입을 하였을 때 비상시로 운영이 되는 산성이다. 환도선성 밑의 평지에는 고구려인들의 무덤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모두가 피라미드형 돌무덤들이다. 고개를 들어 산 밑을 쳐다봐도 고분군이 다가선다. 무수히 많은 무덤들이 놀랍다. 한마디로 ‘떼무덤’이다. 얼마나 많은 고구려인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었을까? 획일화된 중국가옥에 대해 식상할 무렵, 이런 문화유적을 발견하게 되면서 눈빛은 초롱초롱 해진 것이다.
이 곳에서 시내로 내려와 혼강변으로 가면 고구려의 궁궐터였던 국내성터가 복원중에 있다. 복원중이라고는 하나 옛 돌을 모아 축성한 성터는 아직까지 미완성으로 느껴진다.
야트막한 성터 너머로는 조악한 아파트와 민가들이 가득하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고구려의 혼이 서려 있는 성터는 그저 의미없는 돌성에 불과한 것이리라. 왠지 모를 슬픔이 함께 밀려온다. 우리나라라면 최소한 이렇게 문화유적을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리를 옮겨 집안의 호강대주점(0435-6233858)이라는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호텔내에 있는 식당. 된장찌개는 물론 김밥도 차려낸다. 엽차가 향긋하다. 찻잔이 비면 친절하게 아가씨가 물을 다시 따라준다. 바로 옆에 앉은 일행중 한명은 물을 따를 때는 주먹을 쥐고 탁자를 두드려 주는 것이 예의라고 한수 가르쳐 준다.
식사후에는 잠시 물건을 파는 시간이다. 참깨와 참기름, 장뇌삼, 압록강변의 포도주다. 압록강변에 서리가 내리면 숙성을 시킨다는 포도주 한병 사는 것으로 끝을 내고 재래장터에서 잎감귤을 사고 밀병을 산다. 사람들의 순박한 표정에 가슴 뭉클해진다. 약소한 돈이지만 그들의 힘겨운 삶에 잠시나마 활력이 들기를 기원해본다.
집안을 떠나오기 못내 아쉬운지 주최자측에서는 북한 시멘트 공장을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안내를 한다. 앞서 말한대로 강 건너편이 평안북도 만포땅이다. 북한의 행정지명으로는 자강도 만포다. 바로 앞에 보이는 땅은 압록강 가운데 있는 섬이라는데, 이름은 벌등도라고 한다. 이곳을 압록강 풍치구라 하여 조망대도 만들고 유람선도 띄워 이곳을 찾는 ‘남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돈벌이한다.
그렇게 고구려 역사 현장을 뒤로 하고 다시 처음 도착했던 단동을 향한다. 이제 하룻밤을 보내면 중국 땅을 떠나야 할 상황. 북한식당이 석식코스다. 평양칠보산식당(0415-2125078). 자그마한 실내엔 일행말고도 손님으로 꽉 차고 자그마한 무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오르간 같은 것만 놓여 있다. 정작 춤이나 노래는 손님 눈높이와 같은 바닥에서 행해지고 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식사가 차려지고 춤과 노래가 이어진다. 음식은 생각보다 맛이 없었고, 정작 평양 냉면도 없이 밥으로 대체를 해야 한다. 숙소로 가는 길목에서 압록강대교 야경을 감상한다. 북한쪽 절반은 불이 꺼져 있다. 오후 9시면 중국측의 불도 꺼진다.
홍원대주점(0415-3877777)이라는 숙소로 돌아와 TV를 켜니 한국방송이 나온다. 멀뚱하게 앉아 있다가 중국여행의 마지막 밤을 이렇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작정 로비로 나왔다.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은 중국거리를 혼자서는 걸어다닐 수 없는 일. 로비에서 ‘비어바’를 외쳐봐도 알아 듣는 이가 없다. 다행이 가이드를 동반해 일행을 이탈해 꼬치구이집에서 술을 마신다.
자라는 글자는 중국식으로 ‘촬’로 읽혔는데, 한국식으로 말하면 편안하게 숯불에 꼬치를 구워 먹는 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허름한 식당 밖에는 양고기, 생선류, 조개류, 닭발 등 가짓수가 무수히 많았는데, 중국돈으로 1원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직사각형으로 된 불판에 조개탄이 지펴지고 초벌구이한 꼬치를 고춧가루에 찍어 구워 먹는다.
안주가 익어가고 고량주 한잔을 입에 털어 놓고 중국담배를 피워 문다. 술과 담배는 입에 썩 맞지는 않았지만 그저 분위기에 취한다. 내친김에 노래방에 대한 호기심도 저버릴 수 없다.
조선족이 운영한다는 노래방을 찾았고, 실내는 매우 컸다. 과일과 맥주 기본이 4만원정도. 아가씨 팁이 1인당 3만원. 조선족이 없다고 해서 한족 아가씨를 불렀는데, 날씬하고, 나름 세련미가 느껴지는 그들은 번호를 찾아주면 눌러주는 정도로 서비스를 해주었다.
그 다음날도 스케줄은 있었다. 저녁 배를 타기 전까지 고구려 박작성 등정과 유람선을 타는 일이다. 중국에서는 이 성을 호산장성이라고 부르는데, 이 산성을 중국정부에서 만리장성의 동부라고 우기고 있다고 한다. 1469년에 세워졌으며, 그후 관리가 소홀했다가 1992년부터 복구해 지금은 고려성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복원 당시의 석축은 고구려 축성술인 품자쌓기 형태가 선명했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30~40분 오르면 정상. 성을 내려와 성문을 지나면 ‘1보하’ 라는 지점과 좁은 강폭을 일컬어 그야말로 ‘지척’이라는 돌팻말이 있는 곳을 만날 수 있다.
강물 끝자락에 예전에는 북한 초소가 있었다고 한다. 개천에서 빨래를 하는 중국아낙들. 배 몇척이 떠 있다. 저 물길은 북한을 통과하겠지. 개 한 마리가 다가와 친한 척한다. 저 개야 말로 자유롭게 북한땅을 넘나들 수 있을텐데 말이다. 어쨌든 커다란 무쇠솥에 볶아낸 밤 한봉지 사고 유람선을 타기 위해 압록강 대교쪽으로 온다.
유람선은 30여분 정도 신의주, 위화도, 월량도 근처를 맴돌았다. 건물 가옥과 사람들, 고깃배를 지척으로 보면서 여행을 끝마친다. 세월은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 여행이 아쉬운 것인지, 돌아오는 배에서 밤이 새도록 술판을 벌린다. 목이 새도록. 무엇이 그렇게 그립고 아쉬운 것인지…

■여행포인트 : 선상이든 어디든 음식은 대부분 우리 입맛에 맞았다. 따로 밑반찬은 준비하지 않아도 될 듯. 백두산은 기온이 낮기 때문에 산행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은 기본이다. 기능성 옷을 챙겨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소화제, 두통약, 변비약, 설사약 등은 꼭 챙겨가고, 현지 상점을 들어갈 때는 중국돈(위안)이 필요하다. 소정의 돈을 바꿔가면 요긴하게 쓴다. 일정이 끝나고 혼자서는 절대로 돌아다니지 말아야 하며 혹시 나갈 때에는 숙소 명함정도는 챙기는 것도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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