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파리하면 에펠탑을 떠올린다. 에펠탑 없는 파리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에펠탑은 파리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됐다. 그러나 처음부터 에펠탑이 그런 영예를 가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근대 건축에 철강을 최초로 도입한 철의 마술사’ 구스타프 에펠(Eiffel, Alexandre Gustave, 1832~1923)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에펠탑’을 통해 고상한 파리의 이미지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지어올린 인물이다.
1832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에펠의 꿈은 화학자이었다. 그러나 그는 20대에 우연히 철도건설 기술자를 만나 철도회사에 취업하면서 그의 꿈이 바뀌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1858년 보르도 근교의 갈론강에 길이 22m의 철교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너무나 멋지고 튼튼한 교량을 건설하고는 자신감을 얻은 에펠은 1877년 자신이 직접 건설 회사를 세워 포르투갈의 도루 강에 길이 160m의 아치형 철교를 건설하는 등 철제 건축가로서 명성을 쌓아 가기 시작했다.
그는 다리 건설에 철을 최초로 도입해서 성공을 거두면서 철강을 주체적인 재료로 삼는 근대 건축기술의 창시기에 있어서 이론과 실제의 두 방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그런 에펠에게 1889년, 프랑스 혁명 1백 주년을 맞아 개최하게 된 파리 만국박람회를 상징하는 높이 320m의 거대한 구조물 에펠탑을 건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석조건물에 익숙해 왔던 빠리지앙들이나 보수주의 건축가들은 철로 된 탑의 건축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프랑스는 미술계, 문학계, 음악계의 유명 인사들로 구성된 ‘3백인 위원회’를 만들어서 ‘예술 대 산업’이라는 논쟁에 휩싸였다. 많은 예술가들은 철로 만들어진 탑이 파리의 경치를 해치는 것이라고 해서 심한 반대를 했다. 이 논쟁은 ‘건축가 대 공학자’ 또는‘돌 대 철’이라는 대결적 양상으로 변모했고 파리 오페라극장의 설계자 샤를 가르니에와 에펠 간의 대결의 장이 됐다.
가르니에는 철은 쓸모가 있긴 하지만 결코 ‘예술적’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철은 건방지고 무미건조하고 저속한 재료였으며 수단은 될지언정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철은 석조가 갖는 고전적인 아름다움과는 본질적으로 조화된 수 없는 재료라고 선언하고 에펠을 공박했다. 하지만 에펠은 수많은 반발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한 치의 오차나 아무런 사고 없이 완벽하게 탑을 완공했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위대한 도전과 그 도전에서 얻어진 영광 때문에 ‘근대 건축에 철강을 최초로 도입한 철의 마술사’, ‘상상의 힘으로 근대 유럽을 건설한 공학 천재’, ‘에펠 탑과 자유의 여신상을 창조한 불세출의 기술자’로 프랑스인들에게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그 후에도 다채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끊임없이 새로운 구조물을 구상했고 그의 강렬한 호기심은 건축과 관련한 바람의 문제와 항공역학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돼 프랑스 항공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자유의 여신상’ 내부설계와 ‘파나마 운하’ 건설에도 참여했다. 만년의 에펠은 프랑스뿐 아니라 미국, 그리스, 일본, 세르비아, 러시아, 이탈리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캄보디아, 베트남에서도 국가훈장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1923년 12월, 이 ‘독창적이고 겸손했던 철의 마술사’는 91세를 일기로는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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