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에 9경이라는 것이 있었나? 눈이 소복히 쌓인 다음날 설봉산을 오르면서 안내표지판에 자주 등장하는 9경이라는 단어가 왠지 낯설다.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곳을 8경이라 칭하고 계곡의 아름다운 곳을 9곡이라고 일컫는데, 이곳은 9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천의 9경이 못내 궁금했는데, 도드람산 삼봉(마장면 목리), 설봉호와 설봉산 삼형제바위 그리고 설봉산성(관고동), 산수유마을과 반룡송(백사면 도립리), 애련정(안흥동), 노성산 말머리바위(설성면 금당리)란다. 그중 관고동에만 3곳이 속해 있다.

이천을 수호하는 설봉산(394m). 도심과 거의 맞붙어 있는 산(2km 정도)이라서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이자 건강을 다지는 산이다.
이천을 수호하는 진산으로서 부악, 무학, 부학산이라고도 한다. 그다지 높지 않고 등산로를 잘 정비해 가볍게 산행을 즐기기에 좋은 산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이면서 산행코스를 선택한다. 보편적으로 영월암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구암약수-화두재-부학루를 거쳐 영월암으로 내려오거나 정상을 지나 칼바위가 있는 지점까지 갔다 돌아오곤 했다.
이번 산행 길엔 망설임 없이 칼바위와 산성방향 코스를 잡는다. 초입부터 길은 아주 순탄하다. 눈길 탓인지 평소 보던 것보다 등산객 수는 적지만 심심치 않을 만큼 눈에 띈다.
겨울 햇살에 금방 녹아가고 있는 눈을 아쉬워 하면서 조금 오르니 호암약수터다. 말 그대로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약수터인데, 딱히 눈에 띄는 바위 대신 조형물과 운동시설이 우선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목적없이 말을 건넨다. 실없어 보일 정도로 주제없이 말을 붙여보았더니, 약수에 대한 정보 하나 얻어낸다. 대장균이 검출되어서 음용이 적합지 않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참으로 괜찮은 약수터였는데, 산속도 오염이 되어 버렸구나. 하지만 이미 마셔 위장속으로 들어간, 물속에는 대장균이 들어가 꿈틀거리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간사하다.
운동시설대를 지나고 산길을 오르면서 또 사람들을 만난다. 겉보기에도 행색은 등산객같지 않다. 산성을 쌓으러 올라가는 길이란다. 그들에게 산성에 대한 정보를 묻지만 정작 아는 것은 없다. 그저 문화재를 쌓고 다듬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산성터다.
자연석이 아닌 새로 쌓은 듯한 표시가 나는 돌을 이용했는데, 위치적으로 360봉우리 북쪽 산성터일 것이다. 성문을 지나면 성곽위에 넓은 평지가 나오고 그곳에 일부러 심어 놓은 듯한 철쭉꽃 군락지에 목화솜처럼 눈꽃이 쌓여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설봉산성은 일명 기치미 고개에서 중일리에 이르는 산줄기의 연봉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쪽과 남쪽은 물론 주변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실제로 성곽 끝자락으로 다가가보니 이천 시내가 한눈에 조망된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1.079㎞이고 삼국 시대의 산성 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산성을 부학산성, 무학산성, 관고리성이라 부른다. 발굴조사결과 칼바위 부근의 토광과 서문지 하부에서 백제 토기가 다수 출토되어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백제 석성일 가능성에 대한 견해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반면 동문지 상단 및 성내 전역에서는 단각고배류와 인화문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함통(咸通) 6년( 865)이 새겨진 벼루가 출토되어 이 산성이 삼국 시대에 축성되어 9세기 중엽까지도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방향을 틀어 능선을 따라 오르면 칼바위가 모습을 드러내고 봉수대도 복원되어 있다. 하지만 안쪽에는 쓰레기가 가득하다. 그 주변으로 남장대와 제단 등을 만난다.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남장대는 지휘를 하는 곳으로 건물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산성을 지나 성화봉을 지나 능선길을 따라 오른다. 제법 눈이 많이 쌓이고 정상부근이어서인지 바람도 차다. 연자봉을 지나고 성희봉을 지나고 나서 설봉산 정상 표지석을 만난다.
이곳에서는 앞이 훤하게 트여 이천시내와 설봉호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시야도 넓다. 등산객과 목적없는 잡담을 하고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능선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영월암 팻말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부학루-화두재(예전 마장면에서 이천읍내로 오던 옛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영월암자로 내려갈 것인가를 생각중인 것이다. 결국, 영월암자를 택해 내려오는데, 사람 발자욱이 많지 않은 탓에 다리에 힘 잔뜩 주고 내려와야 한다.
영월암은 신라때 창건된 절로 알려져 있다. 이곳이 좋은 것은 수령 640년이나 된 나옹화상이 심었다는 거대하고 우람한 은행나무와 마애상 등이 있어서다.
계절이 바뀌었어도, 한해가 지났어도,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절집은 그렇게 그 자리에 있다. 오후 햇살에 눈이 녹아내리면서 처마에 빗물처럼 물이 떨어진다. 마치 해빙기의 모습을 연출한다. 한갓진 겨울 산행. 왠지 부잡스럽던 속 마음까지 차분해진다. 하산길의 찻길에도 눈이 다 녹아내렸다.
그러나 옛날 옛적에 삼형제가 호랑이에게 잡혀 가는 어머니를 보고 산으로 뛰었는데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삼형제 바위는 결국 놓치고 말았다. 2007년 4월에 만들어졌다는 ‘설봉서원’을 앞에 두고 등산로를 발견한 것이다.
어쨌든 설봉서원(원장 조남철)이 들어선 것에 눈길이 간다. 이미 성벽 쌓는 인부에게 주워들은 정보이긴 하지만, 원래 이곳에는 유명한 식당집터였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기 굽는 냄새 진동하면서 등산객들을 유혹하던 식당은 어느 해 사라졌고, 그 자리에 번듯한 서원이 들어선 것이다.
이곳의 사무장 최호상(031-632-6564)씨를 만나 햇살 좋은 툇마루에 앉아 대충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리해보면 설봉서원은 조선조 명종19년(1564) 이천부사였던 정현공이 지금의 안흥지 주변에 세웠던 서원으로 당시에는 안흥정사로 불리우다가 선조25년(1592) 설봉산 아래로 옮기면서 설봉서원으로 명명되었다.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136년 만에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복천 서희 선생, 율정 이관의 선생, 모재 김안국 선생, 소요재 최숙정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깊은 내막이야 그렇다치고 화, 목요일에는 오전 10-12시까지 한자 공부를 가르친단다. 학습지(3천5백원)을 구입하면 된다고. 향사 이외에도 특별한 날에는 여러 가지 이벤트를 하고 있다는데, 아직은 활성화되지 않은 듯하다.
서원을 비껴 내려오면서 시립 월전 미술관(031-637-0032~3, www.iwoljeon.org)을 지나치고 현충탑, 2001세계 도자기엑스포를 연 이천세계도자센터(031-631-6507, www.wocef.com), 설봉국제조각공원, 국궁장, 충효동산, 문학동산, 설봉호 등을 끼고 돌아나온다.
설봉공원에 언제 이렇게 많은 조형물들이 들어섰는지는 알 수 없다. 호수나 도예촌만 돌아도 한나절은 충분히 소요될 정도다.
어쨌든, 아주 느릿하게 시작된 겨울 산행. 남들보다 느린 걸음으로, 오가는 등산객들 부여잡고 이야기 하고, 사진 찍으면서 돌아다닌 산이지만 그다지 시간을 많이 소요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저 걷기만 전념한다면 1시간-2시간이면 족할 산이다. 하산 길 배고파서 이천 쌀밥으로 배를 채우니, 마치 어린아이처럼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걸어서 행복하고, 먹어서 즐거운 겨울 산행. 그저 할일없이 시간 보내지 말고 지금이라도 야트막한 야산이라도 찾아나섬이 이 겨울을 이기기에 좋을 듯하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