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대(周代)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을 군, 현으로 바꿔 중앙집권제로 개정했다.
시황제는 B.C 213년에 군신들을 함양궁(咸陽宮)에 모아 주연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박사(博士:벼슬이름) 순우월(淳于越)이 군현제를 폐지하고 종래의 봉건제도로 부활하자고 하자 장내는 긴장된 분위기로 변했다.
시황제가 순우월이 제의한 문제에 대한 가, 부를 신하들에게 물으니 정승인 이사(李斯)가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통일 이전까지는 제후(諸侯)가 서로 공격하고 싸움을 되풀이해 천하가 혼란했으나 이제는 천하가 통일돼서 법령이 한곳에 나와 질서가 서고 세상이 안전한데 옛 학문을 하는 자들이 틈만 있으면 시대가 달라진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조정이 하는 일에 흠을 내 비방하는 것을 일삼고 있나이다. 차제 민생에 필요한 이외의 서책은 관에서 거둬 소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시황제가 이사의 제안을 채택해 즉시 시행에 들어 의약, 점술, 농경(農耕)과 奏의 기록물 이외의 서책은 모든 민가에서 관에 제출돼 소각됐다. 유가(儒家)의 경전(經典),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귀중한 문화재 서적이 모두 소각됐는데 이것을 ‘분서’(焚書)라 한다.
한편 시황제는 나이 50에 가까워 지면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신선설(神仙說)에 몰입해 선도의 길잡이로 알려진 방사(方士)라는 사람들을 신임했고, 그 중에서도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가장 신임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그런데 시일을 끌어 시황제로 부터 돈을 얻을만치 받아내자 시황제가 불로장생의 술(術)이나 선약(仙藥)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시황제가 덕(德)이 없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항간에 퍼뜨리고 도망쳐 숨어버렸다.
마침 함양(咸陽:오늘의 面安)에 사는 유학자(儒學者)사이에 시황제의 부덕론(不德論)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다는 정보가 시황제 귀에 들어갔다. 대노한 시황제가 “이것은 필경 도망친 방사가 유학자들을 통해 만들어낸 모함”이라 단정하고 비밀리에 내사해 봤으나 뚜렷한 주동자가 없었으나 그들이 시황제를 비방한 것을 사실로 알고 함양에 거주하는 학자 460여명을 잡아 생매장하는데 대다수가 유생이였기에 ‘갱유’(坑儒)라 한다.
후일의 학자들은 이 사건을 전국초기 효공(孝公)이 패권주의를 국시로 정해서 비유(比儒)정책을 취한 것에 연유한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