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에 한국을 방문한 IMF의 깡드쉬는 “한국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품질 성장(high quality growth)이 필요하다”고 조언한 바 있다.
당시 우리 언론 매체들은 이를 고품격 성장으로 번역해 기사화 했다. 품격은 등급을 뜻하니 고품격 성장은 고급화 성장과 같은 말이 된다. 고급화 성장? 세상에 그런 말도 있는가. 품격은 한국에서만 유행되는 이상한 단어다.
품질이 세계 공통의 키워드이다. 품질은 고객의 실질적 필요(needs)를 채워주는 정도로 측정된다. 따라서 고품질 성장이란 실제필요와 고객만족에 집중하면서 경제의 모든 생산분배 프로세스를 개선·운용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우리 경제는 과연 어떤 유형의 성장을 해왔는가.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는데, 사실 우리는 고품질을 고품격으로 곡해하고 항상 품격만 찾다보니 요즘 뼈아픈 대가를 치르고 있다. 최근의 우울한 뉴스를 간추려 보자.

연합뉴스(2002. 8. 16)에는 올해 상반기 상장 및 등록기업의 순이익이 사상 최대라는 소식과 함께 우리 경제의 취약점으로 수출 감소, 무리한 내수 진작, 국민의 씀씀이가 헤퍼진 일, 재정·가계의 부실화 문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격차가 날로 벌어지고 있다는 통계가 제시된다.

품격·체통만 따지는 사회
중앙일보(2002. 10. 3)에는 젊은 층을 표적으로 하는 해외명품 브랜드의 최근 동향이 소개되며, 한은 통계(2002. 10. 3)는 가계 소비지출에서 신용카드 빚이 크게 증가하고 소비지출의 대형고급화, 수입품 급증, 빚 내서 고급차를 구입하는 등 특히 청년층의 소득초과 지출, 충동구매, 자기과시형 소비가 우려된다고 지적한다.
품질보다 품격을 앞세우는 풍조가 만연되고 “비싼 것이 좋은 것”이란 엉뚱한 공식이 먹혀 들어간다. 고품격은 유난히 체통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었다.
결혼도 고품격으로 하자는 세상 아닌가.
일전에 중기협중앙회 김영수 회장이 중소기업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에서 주5일제 등 중소기업 현안과제를 특강하다가 “대학 졸업생들이 99.7%의 중소기업을 외면하고 0.3% 밖에 안 되는 대기업으로만 가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기업에 취직해야 혼인발이 서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그건 우리 사회 모두의 책임”이라고 한탄한 적이 있었다.

고품질 경제개혁 시급
아직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고품격은 격에 맞지도 않는다. 주차장이 없어서 값비싼 고급 승용차를 도로에 밤새 주차하는 예도 있고 영수증 주고받기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회가 아닌가. 앞으로도 엄청난 통일 비용을 계속 감당해야할 우리가 아닌가. 현 단계에서 고품격은 허영심일 뿐이다.
물론 고품격을 찾든 말든 그것은 소비자 각자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고품격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중소기업이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사치성 소비와 최고급 브랜드 선호는 브랜드 파워가 미약한 중소기업에게 큰 위협이 된다. 고객의 실질적 필요를 알고 품질로 승부하는 것이 건전한 경제의 본래 모습일진데, 품질보다 고품격만 찾는다면 중소기업이 설 땅은 어디인가?
경제·사회 곳곳의 실질적 필요를 과학적 방법으로 조사하고 그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고객(시민) 만족에 주력하고 가치창출의 결과를 모니터 하는 방식이 정부 서비스에서도 자리 잡아야 한다.
이러한 고품질 성장의 경제정책과 사회개혁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이 모두가 가야할 진정한 대중기반의 경제요, 중산층과 중소기업을 살리는 긴요한 첫 단추일 것이다.
jklee@s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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