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까지 와서 만리장성을 빼놓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일찍 일어나 정말 부실한 조식을 먹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나갔는데, 또 가이드는 차를 못잡고 헤매고 있다. 도대체 그 유명한 만리장성 가는 차 타기가 이렇게 힘겨운지 상식선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자가용 영업하는 사람이 집요하게 따라 붙더니만 400위안을 제시했고, 결국 또 이곳에서도 거금을 쓰게 된다. 전날 택시기사가 700위안이라는 말을 했기에 싸다 싶었지만 대중교통은 얼마나 싸겠는가.

그렇게 만리장성에 도착하게 됐고, 나름대로 인상이 나쁘지 않은 류서영(13716424676)이라는 운전사는 많은 이야기를 해댔다. 그는 관광객들 대부분이 걸어서 만리장성을 본다는 위치에 내려줬다. 걸어야만 만리장성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일러서인지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만리장성의 모습이 제법 멋지다. 천천히 입구를 향해 산성을 따라 오른다.
중국 여행의 제 일착으로 꼽히는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을 징발해 대량의 벽돌을 쌓아 장성을 연결해 현재의 장성 원형를 만들었다. 그 길이가 1만여 리(당시의 1리는 약 400m)에 달해서 만리장성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하북성 북부 연산 산맥의 높은 산마루를 따라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약 6,400km(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중국에서도 “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사나이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는 속담이 있다. 현재 관광객에게 개방돼 있는 곳이 여러 곳 있지만, 그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이 팔달령(빠따링) 장성이다. 사통팔달로 만리장성이 이어지는 이곳은 중국인과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 일년 내내 붐비는 곳이다. 그 외에도 무티앤위(모전욕), 거용관 장청, 사마대 장청(쓰마타이 창청), 금산령 장청 등이 있다.
당시,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지만 필자가 오른 만리장성은 유명한 곳은 아닌 듯하다. 팔달령을 비롯해 몇 개의 산성에서는 케이블카를 이용해 올라 갈 수 있지만 이곳은 걸어서 한걸음 한걸음 발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료를 뒤적거려 찾아보니 필자가 간 곳은 거용관 산성인 듯하다.
거용관 입구에는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란 누각이 있고 양쪽 봉오리에 누대가 있는데 양식은 우리나라의 성곽 양식과 비슷한데, 조금 더 높고 웅장하다는 느낌이 든다. 1342년에 건설한 운대가 거용관 볼거리의 으뜸인데 장방형 석재로 기단을 쌓고 위는 난간석이 있으며 아치형 문이 있다. 입구는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문을 통과하더라도 그 안에 갇히기 때문에 방어에 용이하게 처리돼 있다. 운대 좌우로 하여 양쪽 봉우리를 타고 장성이 펼쳐지는데 정상에는 누대가 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하천위로도 성이 건설돼 있어 그 또한 장관이다. 문 주변에는 당초문을 비롯해 용, 신장, 운문, 연화문이 있고 기둥에는 코끼리, 태극, 기린, 십자형, 운문, 금강저 등이 있으며 운대 안쪽 벽에는 한문과 범어가 조각돼 있고 사천왕상과 여러 불상이 있고 천장에는 작은 불상들이 연화문 꽃밭에 둘러 싸여 있다. 건설과정에서 혹은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터인데 마치 이곳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통로인양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 같다.
거용관은 만리장성 6350㎞를 관장하는 3개 관중 북경을 방호하는 중심축 역할을 하였는데 흉노족의 남하를 막는 역할을 했으며 동쪽 끝 발해만과 만나는 지점에는 산해관이라 하여 주로 여진족을 방호하는 곳이 있고 서쪽 끝으로는 감숙성에 가옥관이 있다. ‘사기’에는 만리장성은 요동에서 임조까지 이어진다고 기록돼 있다.
거용관을 뜻풀이 하면 ‘머무르는데 쓰이는 관청’이라는 말이 되는데 중국에서는 용(庸)자에 죄수의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죄수를 통해 유지·보수하였다는 해석을 한다고 한다. 이곳이 기원전 3세기에 쓰인 여씨춘추(呂氏春秋)에도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사용된 것은 명나라 훨씬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나오는 길목에 식사를 하기 위해 안내를 받았는데, 길 표시석에 ‘13구’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기암절벽이 펼쳐지는 그곳에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궁전이 있다. 분명히 이곳도 관광지일 터. 하지만 그저 눈도장만 찍는다. 운전자가 말해준 것은 이곳은 ‘명13릉’이라는 곳이란다. 명대 13 황제들의 호화스런 저승궁전으로 명나라 13대 황제 만력제와 황후를 모신 정릉인 곳이다. 지하궁전의 내부에는 황제와 황후가 사후에도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생전의 황궁처럼 꾸며져 있다고 한다. 명제 3대 황제 영락제부터 말대황제 승정황제까지(1409~1644) 약 200여년을 거쳐 만들어진 13릉은 면적이 40여 평방km이다. 그 중 제일 크고 오래된 장릉과 명13대 황제 만력황제와 두 황후가 매장된 정릉의 최대의 지하궁전(지하 27m)만 일반인에게 공개 되고 있다고 한다. 대개는 그 가운데에서도 정릉만 보여준다. 정릉은 13릉 가운데 유일하게 발굴된 능으로 호화스러운 지하궁전의 건축과 출토품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운전사는 하북땅 내몽고쪽으로 가면 강휘초원이라는 곳을 알려주었다. 야영도 가능하고 양고기도 즉석에서 구워 먹을 수 있으며 차량비는 600위안이 든다고 가르쳐 주었다. 인상은 좋았지만 비싸다는 단어를 모르기 때문에, 또한 그곳 생리를 몰랐기에 엄청난 돈을 주고 만 것이다.
북경은 한마디로 앉아서 코 베어가는, 우리 70년대 경제 발전 시작되면서, 시골서 상경한 사람들이 봉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일찍 일을 마치고 긴 시간 공항에서 기다렸다. 눈치껏 티켓팅도 하고 무사히 모든 과정을 통과해서 면세점도 들르고 게이트를 찾아나섰는데, 온통 한국사람들이다. 모두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들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패키지 여행을 나선 사람들일 것이다.
용강협도 못가보고, 자금성도 택시 운전사 기다린다는 바람에 못보고 왔으며 온통 바가지를 쓰고 왔으니 배우는데, 돈 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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