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나만을 위한 여행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차로 휑하니 달려가 그저 먹고 마시고 하는 여행이 아니라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녀보는 일이다. 낯선 곳에 서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지방 특색을 느껴보는 일은 외국여행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결국 여행이란 ‘새로움, 일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 달 정도의 국내 배낭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산청 여행을 마치고 진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서로 말이 통해도 할 말이 없고 서로 관심이 없다. 말 안통하고 피부색과 얼굴 다른 유럽과 별다르지 않다. 길을 물어보는 정도는 어느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니 말 통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연신 핸드폰 벨소리에 신경을 쓰이게 하는 젊은이는 오히려 친절하지 않다.
그래도 기분이 묘하다. 진정으로 나만을 위한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 일이라기보다는 나를 위한 ‘재충전’여행이라는 것, 그리고 국내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무거운 등짐과 대중교통을 이용해, 낯선 도심을 배회하겠다는 것이 결코 싫지 않은 것이다.
해가 어둑하게 내릴 무렵, 터미널에 내렸고, 일단은 남강으로 지는 낙조와 진주성의 야경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바삐 걸음을 옮긴다. 터미널에서 진주성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겨울해가 워낙 짧은 탓에 어느새 붉은 노을을 약간 보여주고 인공조명등의 불빛이 거리를 채워버리고 만다. 거리를 걷다가 길거리에서 사주를 보고 있는 아낙 두 명도 만나고, 벤치에서 일찍부터 술추렴하고 있는 남정네의 유혹의 목소리도 듣는다. ‘술한잔 하이소’라는 취기어린 낯선 경상도 사투리가 그다지 역겹지 않은 것은 색다름에 대한 도전감이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깔린 진주성(사적 제 118호)으로 들어간다. 이 진주성은 삼국시대부터 외적을 무찌르기 위해 세워진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거기에 임진왜란때 진주대첩은 권율의 행주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3대 대첩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큰 전투를 치른 곳이다.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물의 성’ 진주의 군, 관, 민 7만여명이 성 밖 군사와 통신하는 동시에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유등을 띄웠다는 유래를 갖고 있는데 지금도 진주에서는 봄철이면 유등축제를 펼친다.
이 축제는 지난 2006년부터 3년 연속 문화체육관광부 최우수축제로 지정을 받아 그때가 되면 온 언론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하지만 지금은 성곽에 불조차 없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서 주말에도 소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칠흙처럼 어두운 성곽에 촉석루 건물 만이 조명등이 켜지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논개. 장수가 고향인 그녀는 당시 한낫 기생에 불과했지만 의기(義妓)로 불려진다. 밤이라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이곳에서 잠시 논개를 떠올리고, 길을 돌아나와 숙소를 정하고 강변 옆으로 열지어 이어지는 유정장어집(055-746-9235)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 장어 한 마리 가격은 1만6천원. 아르바이트 학생의 얼굴에는 어린 티가 좔좔 흐르지만, 친절하다. 음식도 제법 깔끔하고 친절한데, 긴 겨울밤이 지루해서 이 지역산 소주 한병을 시켜 마신다. 창밖으로 강 너머 마을의 불빛이 일렁거리고, 앞자리에 앉은 어린아이의 재롱짓이 재미있다. 물소리 출렁거리고, 인터넷까지 되는 평범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와 중앙시장을 찾아 나선다.
중앙시장을 꼭 다시 오고 싶었던 이유는 시장통 안에 있는 제일식당의 비빔밥을 먹기 위함이다. 어느 해 북적거리는 시장통에서 먹었던 진주 육회비빔밥은 예상을 뒤엎고 맛이 좋았다. 시장안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붉게 익은 석류, 감, 사과를 파는 상인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서 제일 식당을 찾았지만 비빔밥은 오전 11시가 넘어야 먹을 수 있단다. 뚝배기에 밥 말고 된장 풀어 만든 시래기에 조각난 깍두기가 전부인 시락국으로 요기를 한다. 오늘 떠나면 언제 진주 비빔밥을 먹을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를 일.
이렇게 진주를 벗어날 수는 없다. 비록 등짐이 무겁고, 대중교통으로 여행을 다닌다 해도 진주성만은 제대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성문을 들어서 촉석루 누각 툇마루에 앉아 남강을 바라다본다. 강변에 떠 있는 배 한척에는 아리따운 한복을 입은 여인네와 마당쇠가 열심히 노 젓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가 논개인지는 가늠할 수 없다.
유유히 흐르는 남강과 배를 타는 조악한 남녀의 조형물이 드높고 맑은 하늘과 어우러져 제법 멋진 풍치를 보여준다. 누각을 내려와 강변 옆 바윗돌로 나가본다. 의기 논개가 한 떨기 꽃처럼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든 바위 의암(義巖)이 있다. 깍아지를 듯한 바위가 휘돌아치고 있는 진주성, 남강과 어우러져 멋진 모습이지만, 아찔한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가파르다. 왜장의 품에 안고 남강으로 뛰어든 논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의 장엄함 때문일까, 아니면 연민일까. 팽그르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진주성을 나와 다리를 건넜고, 분수대도 보고 대나무 숲길을 지나서 강변 공원 산책로로 나선다. 강 너머로 진주성이 한눈에 조망된다. 한참이나 그곳을 배회하고 터미널로 갔고,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버스에 앉았다. 진주에서 이곳저곳 보려고 욕심내지 않았다. 손에 잡힐 수 있는 곳들만,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들만, 번복해서 돌아다녀 본 것이다. 그런대도 평상시의 여행보다 가슴속 깊이 여행의 기쁨이 새겨진다. 문득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라는, 오래전 읽은 이제하씨의 소설이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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