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후원자, 마케팅의 아버지

이탈리아 북쪽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지오반니 메디치는 십자군원정 이후 상업으로 점점 번창해가는 자유도시 피렌체로 이주했다. 그는 귀족을 대상으로 한 비단 제조업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나, 금융거래의 중요성을 깨닫고 은행을 설립해서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불세출의 가문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다졌다.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니었지만 은행업을 장악한메디치 가문은 유럽 최고의 부호가 돼 300년간 중세 유럽을 지배했다. 메디치 가문은 4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피우스 4세, 레오 11세)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면서 당대 최고의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명성을 드높였다.
메디치 가문의 성가를 최고로 올리고 피렌체에서 가장 존경받은 인물이 된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는 지오반니 메디치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이룩한 부의 제국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고,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30년간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그는 최고의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지만 자기관리에 철저했고, 피렌체의 안전에 누구보다도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피렌체 공화국을 비롯해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나폴리 시칠리아 왕국, 교황청 등 다섯 개의 도시공화국과 여러 군소 도시들로 나뉘어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코시모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피렌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교를 통해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전력을 기울여서 그것을 실천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에 있어서도 피렌체공화국의 권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코시모는 아버지 지오반니의 유훈을 따라 부의 사회 환원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비를 들여 빈민구제소를 짓고 운영기금을 내놓았으며, 수많은 교회, 수도원, 병원, 복지시설을 짓거나 막대한 금액을 기부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피에솔레의 바디아 성당, 피렌체의 산마르코 성당, 산로렌초 성당 등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해서, 도서관을 개설하고, 학자들로 하여금 플라톤을 연구하게 하는 한편 당대의 위대한 예술가와 사상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그는 단순히 자선이나 과시욕 때문에 예술을 후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권력자의 야망이라기보다는 계몽된 선각자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명예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학문·예술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서며 지금까지 서유럽에 존재했던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위업을 이룩했다. 메디치 가문은 당대의 위대한 예술가와 사상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갈릴레오등의 천재들이 나타나서 어두웠던 중세를 떨쳐버리고 ‘르네상스’라는 위대한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코시모는 죽기 전에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고, 오늘날 까지 사람들은 그를 조국의 아버지고 부른다. 학문의 발전에 기여한 코시모의 노력을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인 에드워드 기번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코시모의 이름은 르네상스와 동의어와 다름없다. 그의 신용은 명성으로 승화했고, 그의 부는 인류에 대한 봉사를 위해 바쳐졌다. 그는 카이로에서 런던까지 서신 왕래를 했으며, 종종 인도의 향료에서부터 그리스의 서적까지 같은 배에 실어 수입해왔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