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蘇州, 수조우)에 대한 기대는 자못 크다. 예로부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서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곳.
양자강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잡은,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유명한 물의 도시. 거기에 유명 민간 정원이 있는 중국 남방의 대표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소주와 항주는 지금도 휴양과 건강의 도시로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고위층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그러나 소주도 상하이와 별 다르지 않다. 그만큼 발전돼 있기 때문인데, 번듯한 건물 등은 이 도시의 경제성장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여러 나라의 산업체가 들어선 상업도시로 잘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차창으로 비쳐진 거리 풍치는 한적함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소주가 귀에 익은 것은 삼국지, 초한지 등에서 많이 본 지명으로 중국 역사문화도시 중 하나기 때문이다. 기원 전 514년에 도시가 성립됐으며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도읍지였다. 동쪽으로 상해가 근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항주와 접해 있다.
소주는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때가 전성기였는데 견직물, 자수, 면방직업 등의 번영과 상업금융이 발달됐다. 당, 송시대에는 비단의 산지로 유명하였는데 중국여행에 가면 으레 들르는 실크 공장의 원조가 이곳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주의 볼거리를 친다면 민간정원이다. “천하의 원림은 강남에 있고, 그중 소주의 정원이 가장 으뜸이다”라는 말을 탄생시킬 정도로 유명한 정원으로 1997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베이징의 서태후가 만든 이화원은 왕궁 정원이지만 소주는 개인정원인 것. 송말에 이르러서는 크고 작은 정원이 170여개가 있었으며 현재는 60여개의 정원만이 보존되어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일반인에게 개방돼 있는 것은 19곳. 송대의 창랑정, 원대의 사자림, 명대의 졸정원과 유원이 가장 대표적인데 가본 곳은 사자림이다.
사자림은 원대 말 고승인 처려선사가 스승을 기념하기 위해 사원으로 건립한 곳. 그 정원에 스승이 예전에 살았던 절강성 천목산 사자암과 비슷한 사자 형태의 태호석을 수없이 배치했기에 그 후에 사자림이라고 불렀다 한다. 사자림은 기대했던 것에 크게 반향을 일으키진 못한다.
그저 사자모양의 자연석이 수없이 많다는 것. 거기에 멋진 연못과 활처럼 휘어진 지붕을 가진 정자, 푸석거리는 연꽃대가 어우러져 나름 멋진 풍치를 자아내고 있다는 정도다.
또 한군데 명소는 한산사다. 서유기의 삼장법사와 연계돼 있다는 한산사. 중국에서도 종교가 자유롭게 인정되고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공산당원이 되지 않는 한 종교는 가질 수 있다는 것.
어쨌든 한산사는 남조 양 천감 연간에 지어진 사원. 원래 명칭은 묘보명탑원이었으나 당대 고승인 한산자가 이 곳에서 머문 후에 그의 이름을 따 한산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의 건물은 일부 파괴돼 신해혁명이 일어난 해인 1911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특히 한산사는 당나라의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이라는 시로도 유명한데, 장계는 노를 저어 마을로 돌아가던 중 밤중에 풍교에 배를 정박해 두고 있었는데 그 때 마침 한산사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하늘 가득 서리가 내리네/풍교에는 고깃배 등불을 마주하여 시름 속에 자고/고소성 밖 한산사에는/한밤중에 종소리가 객선에 이르네.
수많은 관광객과 신도들이 어우러져 매캐한 향초를 피워대고 법당에서는 법회가 한창이다. 뒤켠으로 난 계단을 따라 회오리 계단을 올라 한산사 건물을 한눈에 내려다본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종교가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신기해하면서 한숨을 내쉬어본다.
사실 이 두군데 관광명소는 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만약 운하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소주에 대한 여행은 실망스러운 채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소주 시내를 감싸고 도는 인공 운하는 도시 안에 작은 하천들이 종횡으로 이어져 있다. 작은 다리들이 모두 380여 개나 될 정도로 많아 ‘동양의 베니스’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것. 실제 이 운하 길이만도 160km. 강소-태호 동안-호소지대에서 발원해 동으로 흘러 상해로 들어가 오송에서 양자강과 합류한다.
옛날에는 직접 바다로 흘러 들어갔으나 양자강 각주의 발달로 유로가 변해 지류가 됐다. 명나라 이후 이따금 대규모의 준설작업을 했으며, 청나라 말엽 상해 개항으로 오송-상해간 대형 기선의 항행이 가능해졌다. 오랫동안 공업지대를 연결하는 동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양안에 허름한 민가들을 사이에 두고 자그마한 유람선 배가 도심을 가로지른다.
마치 태국의 차오프리아강을 유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나 강 폭이 좁다. 사람들이 사는 속살이 한눈에 들여다 보인다.
우중충한 황토빛 물에 빨래도 하고 낚시대를 드리운 늙은이도 만난다. 몇 개의 다리를 지나고 유람선이 선 곳은 재래시장. 아직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지 중국 돈 이외에는 쓸 수 없다. 사람들의 향기가 물씬 배어 난다.
관광객들의 얼굴과 상인들의 얼굴은 누가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도 확연히 구분이 된다. 당원 옷을 입은 사람은 별로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차림새와 얼굴빛이 그대로 배어나는 그곳에서야 비로소 중국 여행을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와 다른 문화. 농산물, 먹거리를 보면서, 처절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몸짓에 기분까지 좋아진다. 시간을 더 할애하고 싶지만 가이드는 다른 장소로 이동을 서두른다.
비록 일부러 만들어 놓았다는 옛거리도 찾지 못했고 송대 시인인 소동파가 “소주에 와서 호구를 구경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고 했던 호구산이나 피사탑처럼 기울어진 탑도 주마간산으로 보고 항주로 떠나온다.
(계속)

-이신화·『DSRL 메고 떠나는 최고의 여행지』의 저자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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