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도 어느덧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자연은 때가 되면 옷을 갈아입는다. 이즈음 산하는 해질녘 엷게 퍼진 저녁놀을 쏙 빼닮았다. 보이는 건 온통 진갈색이다. 하늘과 강물만이 푸름을 잃지 않고 있다. 어떤 분은 요즘의 산하를 보고 겨울 봄 여름을 이겨낸 자연의 승리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이즈음의 산천은 옷매무새 곱게 차린 중년 여인 같은 모습이라고. 한 편의 서정시. 이런 표현은 또 어떤가. 아니, 이런 진부한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을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담아내지 못할 형이상학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진갈색은 포근하고 아늑하고 따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일까? 요즘 내 마음도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따듯하다.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이다. 가을이 무르익으면 세상은 오색(五色) 단풍바다를 이룬다. 그래, 이 골짝 저 골짝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화사하다. 잘 익은 감빛이 저럴까? 크레파스로 칠한 그림 한 점. 요즘 산천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어딜 가 봐도 산천의 빛깔이 고르지 않다. 군데군데 점을 찍어놓은 듯 불규칙하다. 자세히 보면 그리다 만 그림 같다. 산천의 빛깔이 매양 같다면 우리는 자연에게서 감동을 받을 수 없다. 자연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잘 것 없게 보일 수도 있고 더 아름답게 다가올 수도 있다. 미적 감각이 있는 이라면 후자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미적 감각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물(풍경)을 의미를 가지고 바라볼 때 자연스레 얻어지는 마음의 산물이다.
나뭇잎이 물들어 하나 둘 떨어지고 산천의 색깔이 바뀌는 것은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다. 우리는 거리에 뒹구는 낙엽을 보면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바라보면서 고즈넉한 감상에 빠지기도 하고 쓸쓸함에 젖어들기도 한다. 가을은 이렇게 사람들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단풍은 나무들의 몸부림이 만들어낸 결정체이다. 어떤 생명의 한 부분이라도 허투루 된 것이 없음을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의 색감(色感)을 보면서, 하나 둘 떨어져 내리는 낙엽을 보면서 알아차리게 된다. 물, 햇살, 바람, 공기, 흙. 단풍이 곱게 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들인데도 우리는 단풍 색깔에만 마음을 두지 이런 자연이 지닌 덕을 잊고 산다.
지금 남쪽은 단풍의 화려함이 정점에 달하는 시기여서 너도나도 단풍 나들이를 떠난다. 그 대열에 나도 끼고 싶지만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누구누구는 대자연을 향유하러 이 가을 아침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꾸리지만 우리 주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바삐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붉은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 가을에는 그 바쁜 삶에서 잠시 벗어나본들 어떠리. 자연은 우리에게 삶 이상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일러준다. 그것은 깨달음이고 새로운 발견이며 감동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풍요로운 결실을 위해 긴 시간을 보낸다. 자연이 준 결실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평등하게 분배된다. 따라서 누구나 이 결실을 나눠가질 자격이 있으며 가을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
청청하던 초목들이 시듦과 조락을 맞고 있는 모습은 대자연의 엄숙한 법칙이다. 다가올 인고의 계절을 위해 마지막 한 잎까지 내놓고 긴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 나무의 생존법은 거스를 수 없는 순리이고 흐름이다. 자연의 섭리 앞에 모든 생명체들은 어쩔 수 없는 변화를 맞고 있다.
도시의 가을은 가로수로부터 온다.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마다 황금색 종을 매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낙엽 물결.
낙엽 뒹구는 거리의 찻집은 온통 젊은 사람들 차지다. 그네들은 그곳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며 소곤소곤 얘기꽃을 피운다. 이것은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이즈음 나무와 낙엽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정(風情)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시간을 내어 그 찻집의 주인공이 돼 보는 것은 어떨까. 간밤에 불던 바람에 떨어진 낙엽이 이리저리 흩날리는 도심의 거리는 스산함과 함께 아, 올해도 다 가는구나, 하는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가을을 가을답게 하는 것은 역시 낙엽이다. 사각사각 낙엽이 층을 이룬 오솔길을 사뿐사뿐 걸어가는 연인들의 모습에서 거친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순해진다. 문득 스산한 마음이 이불솜처럼 따듯해진다. 가을만이 간직한 고즈넉한 분위기는 자연뿐만이 아니라 저렇듯 우리네 삶 속에서도 진하게 풍겨온다.

김동정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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