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사연을 남긴 채 2009년이 저만큼 물러나고, 경인년 새해가 밝았다. 해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매년 이맘때쯤이면 묘한 설렘과 조급함과 새로운 각오가 교차한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되었다는 감격 때문이리라. 찬바람이 무시로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새해에 거는 기대로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따뜻하다.
올해는 호랑이의 해이다. 띠 동물이 바뀌었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달라질 리는 없지만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그 의미에 대해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띠 동물이 갖는 의미를 곱씹어보고 어떻게 하면 실생활에 접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호랑이는 사자와 함께 동물의 제왕으로 불린다. 커다란 덩치에 날카로운 이빨, 얼룩얼룩한 몸피, 강렬한 눈빛은 호랑의 특징이다. 평소에는 어슬렁어슬렁 걷지만 먹잇감만 나타나면 쏜살같이 달려들어 낚아챈다. 호랑이의 또 다른 이름인 산군자(山君子), 산령(山靈), 산신령(山神靈), 산중영웅(山中英雄)은 이 같은 용맹스러움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겨울의 멋은 가지마다 하얗게 눈을 이고 서 있는 겨울나무에서 찾을 수 있다. 눈꽃이 만발한 산은 내게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흰눈이 대지를 하얗게 덮은 날, 거리에 나서면 신비한 동화의 세계에 온 듯한 환상에 젖어든다. 세상이 흰눈 속에 파묻힌 풍경을 보면서 순수를 생각한다. 눈을 반기러 나온 청춘남녀들의 저 맑은 표정을 보라. 끼리끼리 어울려 눈싸움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에서 문득 동심을 떠올린다.
눈은 깨끗함의 상징으로 통한다. 마음이 거칠고 때가 끼여 있는 사람일지라도 눈을 보고 있으면 정결하고 온유한 사람이 된다.
누구나 눈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흰눈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찾아온다는데 그 묘미가 있다. 눈에 대한 기대심리가 크면 클수록 겨울은 내 마음과 하나가 된다.
작년 이맘때가 생각난다. 내가 사는 도시에도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함박눈이 하염없이 그리움처럼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흰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첫눈을 마냥 맞아 보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자 눈송이가 사정없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 감촉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절로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나는 눈을 뭉쳐 힘껏 팔매질을 했다. 눈은 나무둥치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거리는 점점 눈 속에 묻혀 들어가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많은 양이 내리고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마다에는 눈꽃이 피어 동화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사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나무이지만 흰눈이 얹힌 겨울나무야말로 아름다움의 백미(百媚)라는 생각이 든다. 눈꽃 터널을 이룬 산에 가 보라.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하얀 세상! 이런 만남을 통해 생의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눈 그친 뒤의 도시 풍경은 갑자기 술렁거린다. 추억을 담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공원 주변은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벙어리장갑을 끼고 눈을 뭉치는 사람들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해맑다.
겨울 아침, 산에 가면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참 많다.
허옇게 얼어붙은 골짜기의 얼음장 밑으로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겨울 산은 뭐니뭐니해도 눈이 덮여 있어야 제 멋이 난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등산로를 따라 오르노라면 흐려 있던 마음이 어느새 정결해짐을 느낀다.
나무를 곁에 두고 있음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매일 나무와 대면하다 보면 불안정한 마음이 없어지고 속뜰이 고요해짐을 느낀다. 흔히 줏대가 없고 의지가 약한 사람들에게 나무를 닮으라고 말한다. 큰 의미를 던져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나무는 그 어떤 오만이나 자랑을 일삼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다. 모든 자연이 다 그럴 테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들과 가장 친숙한 나무에게서 겸손과 덕(德)을 배우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나무는 언제 보아도 듬직하다. 소나무는 그 쓰임새도 다양하지만 늘 푸르름을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아무데서나 잘 자라고 주위의 어떤 것들과도 잘 어울린다. 특히나 오랜 수령(樹齡)의 소나무를 만나면 예사롭지가 않다.
겨울나무는 한마디로 강인한 생명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람해 뵌다. 봄에서 가을까지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다가 겨울이 오면 그간의 활동을 접고 조용히 속살을 갈무리하는 나무의 살이. 더 튼실하고 훤칠한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 쉼 없는 생명활동을 하는 것이다. 자연은 얼핏 보기에 늘 그대로인 것 같지만 끊임없는 순환 과정을 통해 온갖 혜택을 내려주는 보배로운 존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을 찾아 떠나는 것이겠지.
겨울이 가고 새봄이 찾아오면 모든 나무들은 일제히 연녹색의 움을 틔울 것이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생명체들이 봄기운을 받아 기지개를 켜는 모습은 생명의 환희를 느끼게 한다.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는 나무에게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자연이 위대한 것은 이렇듯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겉치장을 하지 않고 욕심을 채우려 들지 않는 나무의 정직함! 삶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걸출한 모습은 감동이자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희망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한 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다만 옷깃 여미고 겸허한 마음자세로 자신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 사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저 자연처럼 고난을 겪었기에 더욱 빛나는 내일이 되어야 한다.
어쨌거나 2010년에는 누구나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겠다.
올 한해 우리네 마음속에 호랑이 같은 도전정신과 힘이 솟아났으면 좋겠다.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고 국민을 하나로 묶는 통합의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봄이 멀지 않았듯이 저만큼 긴 터널 끝으로 밝은 빛이 보인다.

■김 동 정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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