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면 강진이 떠오른다. 지그시 감은 눈 속에 다산초당, 백련사의 동백 숲, 영랑 생가가 그려진다. 땅에 떨어진 붉디 붉은 꽃봉우리 즈려 밟던 그 길. 강진의 따스한 봄 햇살이 그립다. 강진하면 떠오르는 인물,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그리고 그와 깊은 인연을 맺은 혜장스님이 있다.

다산초당((사적 제107호,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을 찾는다. 서늘하고 어둑한 좁은 산길. 대나무를 속아 낸 덕분에 많이 밝아졌다지만 초당 길은 웬지 엄습하다. 10여분 올라가다 묘지를 만난다. 초당과 연계 있는 해남윤씨 문중의 묘. 귀여운 문무인석을 보고 가파른 길을 조금 더 오르면 동백나무와 숲에 뒤덮힌 다산초당이다.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폐가를 복원한 것. 초당, 동암, 서암, 천일각 등이 있는데 실제는 더 좁았다고 한다.
초당 주변으로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다. 다산은 어떻게 머물게 되었을까? 정조의 총애를 받은 정약용. 수원 화성을 진두지휘 하던 그도 정조가 죽자(49살) 사세가 밀린다. 정순왕후의 복수의 칼날이 있었다. 정순황후는 영조의 마지막 부인. 정순황후는 1745년 생이고 정조는 1752년 생. 아들과의 나이 차이는 7살. 정치적인 부분 말고도 상식적으로 사이가 좋았을 리 만무. 정조의 측근 세력을 제거하려는 것은 뻔한 일. 그러니 정조의 오른팔을 가만 둘리 없다.
천주교인들의 박해를 핑계대고 무차별 학살을 시작한다. 정약용, 형 약전만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유배 길에 오른다. 정약용은 포항의 장기로 유배(1801년)되고 동생 약전은 신지도로 떠난다.
정약용은 ‘황사영백서사건’으로 다시 문초를 받고 9개월 뒤 전남 강진으로 이배(移配, 귀양살이하는 곳을 다른 곳으로 옮김)되고 약전은 흑산도로 보내진다. 이 사건이 ‘신유사옥’. 천주교와 연관 된 종교사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계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다.
오갈 데 없는 다산에게 방 한칸 내어준 사람은 읍내 주막집 할머니. 약 4년간(1805년 겨울) 머문다. 주막집을 사의재(四宜齋)라 명칭한다. 귀양살이가 몇 년 지나자 주변의 감시가 어느 정도 뜸해진다. 다산은 백련사로 첫 나들이를 떠났는데, 산을 오르던 중 승려, 혜장(1772∼1811년)을 만난다. 다산은 44세, 혜장은 30세던 때다. 혜장은 당시 해남 대둔사의 학승으로 두륜회(400여 명)를 이끌 정도로 명망 있었다.
다산과 혜장과의 해후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다산은 혜장의 배려로 강진읍 뒷산(우이산 우두봉) 고성사(1805년)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백련사, 고성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혜장의 영향 권역. 다산은 보은산방(寶恩山房)이란 현판을 건다.
1806년(순조 6) 가을, 다시 그의 제자인 이학래 집(강진읍 목리)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외가쪽 친척인 해남윤씨 덕분에 만덕산 자락에 초당을 짓게 된다. 귀양살이 8년째(1808년 봄). 정약용이 9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조선시대 3재의 한분으로 꼽히던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 귤동마을의 해남 윤씨들은 정약용에게 외가 쪽으로 일가들이다. 제자 중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 3형제가 터를 내어 준다.
18년의 유배생활 중 초당에서 10년.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만든다. 초당에는 다산 4경이 있다. 뒤켠 바위에 새겨진 정석(丁石),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 등이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다산초당, ‘보정산방’(寶丁山房)의 현판이다. 추사 김정희 글씨체고 다산동암만 친필이다. 여기서 연계해야 할 곳이 백련사다. 앞서 말한 혜장스님과 수없이 교류를 했던 길. 천일각 뒤켠으로 오솔 길이 이어진다. 중간에 최근에 만들어진 해월루(海月樓, 바위 위에 뜬 달)가 있다.
또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51호)이 볼거리. 3월말을 전후해 피어나는 동백꽃. 그 숲속, 부도밭에 뚝뚝 떨어진 꽃잎에 매료된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다산, 혜장과의 차 이야기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차와 연계된다. 다산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명. 만덕산에는 야생 차나무가 많았다. 혜장은 차 싹을 따다 정성껏 차를 만들고 돌 밑에서 솟는 물로 차를 제대로 즐겼다. 다산이 강진을 떠나던 해, 제자들은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했을 정도. 우리나라 최초의 차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그 맥을 잇기 위해 만세루 한 켠에 만경다설 절집 찻집을 만들었다. 직접 덖어 만든 일지청양(첫물차), 반야병다(일명 떡차), 자하차를 판매한다.

●백련사(061-432-0837, http://www. baekryunsa.net/), 만경다설(061-433-0838).

■이신화·『DSRL 메고 떠나는 최고의 여행지』의 저자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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