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왕족이 아니고서는 사가는 100칸을 넘지 못하게 법이 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강릉 선교장(중요민속자료 제5호,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은 엄밀히 따져 120칸이 넘어 궁궐을 능가하고 있다. 민간주택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 문화재로 선정되었고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아름다운 전통가옥이다. 선교장은 어떤 집일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간 크게 100칸을 넘는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집으로 들어가보자.
분명히 조선후기 시대일 것이다. 그 무렵, 왕조가 붕괴되어 가는 때이므로 편법을 이용하였을 것이고 자기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교묘하게 99칸이라고 속였을 것이다. 그런데 자료를 뒤적거려 보니 처음부터 100칸을 넘는 집은 아니었다. 1703년,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 무경 이내번이 지었다. 지금까지 10대가 300여년 정도, 이 집을 지키면서 자연스레 칸수가 많아진 것이다. 지금은 건물 10동에 총 120여 칸이다.
그러면 이내번이 어떻게 터를 잡았을까? 어머니 안동 권씨가 있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 이주화의 3취로 결혼했다가 15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과 함께 충주를 떠나 외가 근처인 강릉(경포대 근처 저동)으로 이주한다. 임진왜란 후부터는 출가한 딸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남편 사별 후 재산이 좀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 돈으로 이 터를 사게 되었을 것이다.
이내번이 터를 발견한 유래가 있다. 족제비 떼를 쫓다가 이곳까지 왔다가 뒤쪽에 그리 높지 않은 시루봉 줄기가 두르고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는 명당자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집 주변이 호수여서 배를 타고 들어 다녔기에 마을 이름이 ‘배다리 마을’. 그래서 집 이름도 선교장(船橋莊)이다. 명당이 맞았는지 10대가 넘도록 만석꾼으로 살아온다.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은 돈을 쉽게 가진 사람들 이야기다.
현재는 어떨까? 매표소를 지나면서 눈길을 잡아 끄는 건물은 활래정이다.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진 모습이 매력적이다. 멀리 눈을 들어 안쪽을 들여다보면 구중궁궐 같은 기와집이 길게 늘어서 있고 집 뒤 에둘러 있는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보호수로 지정될만하다. 왼쪽의 초가집과 기와집 일부만 새로 지어 체험장등으로 이용한다. 총 3만평이라는데 그 규모가 가히 어마어마하다.
먼저 시멘트 돌기둥을 받침삼아, 날아갈듯 잘 지어진 활래정을 따라 발길을 옮긴다. 보편적으로 연못은 둥근 형태인데 사각형으로 만든 것도 특이점이다. 인근에서 흘러드는 물이 모여 자연스레 경포호로 흘러가게 된다. 순조 16년(1816) 열화당을 세운 다음 해에 세워진 건물. 현판은 주자의 시(관서유감) 중 “爲有頭源活水來(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에서 땄다고 한다. 전문가 말에 따르면 얼핏 보면 ㄱ자형의 정자로 보이나 구조는 두 채가 하나로 이어진 것이란다.
결구도 지붕도 각각 형성되어 있다. 이런 쌍정(雙亭)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건축 형태. 온돌방과 누마루 사이에 차실이 있다. 이 차실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차실로, 조선시대 사대부는 손님을 찻상 앞에 모시고 앉아서 직접 차를 끓이지 않고 부속차실에서 준비된 차를 다동(茶童)이나 시동(侍童)이 찻상에 들고 내오게 했다. 활래정의 부속차실은 이러한 조선시대 차 풍습을 보여준다. 지금도 다례체험장으로 이용되는 듯하다.
본채 대문으로 들어선다. 세로로 선교장(船橋莊)이라고 쓴 작은 현판과 가로로 선교유교(仙橋幽居,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라고 쓴 큰 현판 두개가 걸려 있다. 조선 말기 서예가인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 1836∼1909)의 글씨다. 현판이 걸린 곳으로는 남자만 드나드는 문이란다. 일자로 길게 뻗은 행랑채 안에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가 연이어져 있다. 건물이나 돌담은 아기자기 하면서도 정교해 한눈에도 주인장의 야문 손끝을 엿보게 한다.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안채는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방과 건너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부엌이 안방 쪽에 붙어 있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열화당(사랑채)이다. 주인의 전용공간으로 이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 15년(1815)에 건립하였다. 열화당 현판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따왔다고 한다. 대청과 사랑방, 침방, 그리고 누마루가 결합된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 가장 특이점은 덧댄 듯한 차양이다. 우리나라 공법으로 지어진 것이 아닌, 러시아인에 의해서다. 이곳에 유숙한 러시안인이 답례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자꾸만 토굴처럼 된 아궁이에 눈길이 간다. 현재 도서관으로 이용되는데, 후손은 열화당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안채와 열화당 사이의 서재 겸 서고로 사용하던 서별당은 1996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열화당 앞에 있는 23칸의 행랑채를 비롯하여 민박이 가능하다. 또 본관 바깥에는 체험장이 있고 개화기때 신학문을 가르치던 동진학교터가 있다.

여행정보
●문의:033)646-3270/www.knsgj.net
●추천 별미집:선교장 뒷문으로 나가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만나는 서지초가뜰(033-646-4430). 창녕 조씨 종가집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창녕조씨 3가구가 살고 있는 마을. 농막을 개조해 식당으로 이용한다. 조진사댁의 전통음식으로 ‘못밥’, ‘질밥’ 두 종류의 메뉴가 있다. 유기농 재료를 이용해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요리 일색. 대대로 내려오는 송죽 두견주도 특별. 가격도 1~2만원대로 비싸지 않다. 식당 뒤켠에 1712년에 지어진 조씨 가문의 전통가옥과 주변의 돌담, 대나무 산책로 등의 모습이 정겹다. 강릉 시내의 감자 옹심이집(033-648-0340), 진또배기 마을앞의 태광회식당(033-653-9612)은 우럭 미역국으로 소문난 맛집. 또 초당두부촌에서는 동화가든(033-652-9885)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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