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을 보고 나면 화성군의 윤건릉과 용주사가 궁금해질 것이다. 정조가 화성을 구축한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보기 위함이었다. 어떻게 정조가 한양에서 백리도 더 떨어진 화성쪽으로 능을 옮길 수 있었을까? 당시 그 시대적 배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질식사 했다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익히 알고 있다. 왜 아버지 영조는 왕위에 올라야 할 아들을 뒤주 속에서 죽여야 했을까? 당시 영조는 노론의 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숙종의 아들이라고는 장희빈의 아들 경종과 영조 뿐인데 남인, 소론의 세력을 얻은 경종은 매우 약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왕권은 실추될 대로 실추된 상태. 거기에 영조는 어릴 때부터 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에 시달렸다. 영조를 낳은 여자는 ‘무수리’로, 왕에게 세숫물을 떠다주는 비천한 여자. 그런 일을 겪고 살아왔기에 영조는 왕위를 지키겠다는 집념이 굉장히 컸다. 당연히 영조는 노론 세력에 기대게 된다.
세자에 책봉된 효장 왕자가 어린 나이에 죽자, 영빈 이씨가 낳은 장헌 세자(2세)가 책봉된다. 10세 때 혜빈 홍씨와 혼례를 올리고 영조 25년(1749), 15세 때 나라 일을 맡는다. 영조는 세자를 어릴 때부터 매우 엄격하게 대한다. 갈수록 아버지 대하기가 껄끄러워지니 자연스레 눈밖에 벗어나게 된다. 거기에 당시의 당파싸움도 한 몫 한다. 세자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 후궁 숙의 문씨 등이 세자를 모함한다. 그럴수록 부자(父子)의 관계는 어긋났고 세자는 그 갈등으로 인해 방탕하게 살게 된다.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은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이 크게 세력을 떨치자 장인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려 한다.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적어 투서한다. 영조 38년(1762) 나경언을 직접 불렀으나 결국 처형되고 세자는 맨발로 경희궁 뜰에 엎드려 사죄한다.
이 때 조정은 세자를 용서해달라는 편과 세자를 처형해야 된다는 편으로 나뉘어졌고 영조는 세자에게 마침내 자결을 명령한다. 이를 듣지 않자 뒤주 속에 가둬 죽게 하였던 것. 이후 조정은 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사도’ 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래서 사도 세자라 하는 것. 당시 28세였고 아들 정조는 11세 때다. 정조가 효의왕후와 결혼한 해다.
그 후 1775년 82세로 연로한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켰고 이듬에 3월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 나이로 조선 제22대 왕에 즉위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세자의 아들이 영조의 뒤를 잇게 되었을까? 영조는 미리 맏아들 효장세자에게 양자로 입적시켜 놓았다. 영조는 정조에게 ‘노론은 너의 원수다’라 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까지 많은 과정이 있다.
정조는 즉위 당일,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다. 생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란 존호를 추상하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높였으며 사당을 경모궁이라고 한다. 정조 13년,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올리고 수원 화산으로 천원하기에 이른다.
당시 수원 화산은 윤선도를 비롯하여 많은 식견가들이 길지로 인정하던 곳. 당시 능은 궁궐에서 100리 밖으로는 이장할 수 없었음에도 정조가 그렇다고 우겨 이원하게 된 것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참나무 숲이 울울창창한 윤건릉(사적 제206호). 26만평이나 되는 숲 길은 계절에 상관없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숲 길을 따라 가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의 합장릉인 융릉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장현왕후(고종때 장조)와 헌경왕후 홍씨(혜경궁홍씨)의 건릉이다. 그래서 윤건릉으로 부른다.
건릉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능 아래, 언덕에 정자각, 비각, 홍살문, 재실이 있다. 정작 능으로 들어갈 수 없다. 대신 가는 길목에 자그마한 연못, 곤신방(주역에서 남서방향)이 있다. 융릉의 생방으로 풍수적으로 이곳에 물이 있으면 좋다 하여 연못을 판 것이란다. 질식사 한 아버지를 위해 물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는데 아마도 그런 의미일 듯하다.
어쨌든 정조는 지금도 아버지 근처를 지키고 있다. 건릉으로 가는 숲길 풍치가 빼어나다. 정조와 효의왕후가 합장된 건릉. 효의왕후는 영조 38년 10세에 간택되어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아이가 없었다. 다른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선빈 성씨가 문효세자, 수빈 박씨가 세자공(순자)과 숙선옹주를 낳았다. 이들 중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어 수빈 박씨 소생 세자 공이 이어 제23대 순조가 등극 한다. 효의왕후는 순조 21년(1821) 춘추 69세로 승하했고 정조의 유언대로 합장했다.

●관람시간(3월~10월)09:00~18:30(1시간 전에 입장) 11월~2월:09:00~ 17:30/매주 월요일 휴관/입장료:성인(1,000원)/주차비(2,000원)/소재:화성시 안녕동 187-1번지/관리사무소:031-222-0142
● 찾아가는 방법:안양시 1번국도~의왕~북수원~동수원~병점 육교 사거리 우회전(3km)~안용중학교~용주사~융릉·건릉/그외 과천~의왕~봉담간 고속도로, 서해안 고속도로~발안IC~봉담, 원 방향을 이용.
● 대중교통:북문, 남문, 수원역:24, 46, 46-1번 버스(40분 소요)/신영통, 영통, 봉담:34, 34-1번 버스(30분 소요).

■이신화·『DSRL 메고 떠나는 최고의 여행지』의 저자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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