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왠지 우국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꼭 그 이유는 아니지만 통영의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흐르는 한산섬 제승당을 찾는다. 너무나 귀에 익숙한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의 시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통영시 남동쪽에 있는 한산도. 뱃길로 2㎞ 정도로 가깝다. 뱃길에서 보니 한산도는 날개짓을 하듯 넓게 펼쳐져 있다. 제승당을 기점으로 동쪽으로 비산도, 송도, 좌도가 있고, 남쪽에는 추봉도가 있는, 생각보다 큰 섬인게다. 아마도 섬 전체를 보려면 1~2일 정도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
두억리 선착장에 닿기 전에 독특한 등대를 스친다. 거북선 닮은 등대다. 이순신과 거북선은 빼놓을 수 없는 일. 섬을 수문장으로 지키고 있는 듯 위용이 느껴진다. 선착장을 앞두고 제승당(制勝堂, 사적 113호)이 그림처럼 다가선다. 유적지 돌 팻말 앞에 선다.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영을 한산도로 옮기면서 지은 건물들과 관련 유적이 있는 곳. 선조 25년(1592년)에 건물을 짓고 1593년~1597년까지 삼도수군 본영으로 삼았던 곳.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시발점인 곳. 신록 우거진 그 섬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한산문으로 들어서니 바다로 휘어진 길, 송림이 길게 이어진다. 아기자기한, 소소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대첩문 앞에 선다. 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과 안내판이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자신이 존경하던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를 성역화했다. 존경할 만한 선인을 닮고 싶은 건 누구나 같지 않을까?
계단 올라 충무문을 지나면서 경내에 들어선다. 눈앞의 세병관(洗兵館)을 기점으로 우측에 ‘수루’, 왼쪽에는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이고 뒤쪽으로 활을 연마하던 한산정이 있다. 우선 수루에 올라 툇마루에 앉는다. 충무공이 자주 올라 왜적의 동태를 살폈을, 일종의 망루. 당시 어떤 상황이었을까? 먼저 임진왜란의 ‘한산도 대첩’부터 알아보자.
선조 25년(1592)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온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고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도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한다.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 방면에서 출동했고,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게 된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우수사 이억기와 연락하여 재출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순신은 7월 6일 47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과 합세했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운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먼저 판옥선(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 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한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했다. 모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됐다.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 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했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했다.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로 승서됐다. 이순신 장군이 1597년 4월 12일 한양으로 붙잡혀가기까지 여기에 진영을 설치했다. 충무공이 이곳을 떠난 후 원균이 이끈 수군이 칠천량 싸움에서 패하자, 당시 경상우수사 배결이 철수하면서 제승당에 비축해 두었던 쌀과 무기를 왜적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불을 질러 태웠다. 그후 영조 15년(1739) 제 107대 통제사 조경이 유허비와 함께 다시 중건했으며 1976년 이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제승당도 새로 지은 것. 원래 운주당 옛터에 지어 운주당으로 불렸다고 한다.
수루 망루에 서서 현재의 모습을 살펴본다. 왼쪽 산 위에 어렵사리 만든 한산대첩비(사람이 찾아갈 수도 없는 자리에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는)와 문어포 마을이 보인다. 거북등대가 있는 바다 오른쪽 산은 망을 보다가 적이 나타나면 고동을 불던 고동산. 세월은 역사를 남겼을 뿐일까? 아직도 이 충무공의 뜨거운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는 듯하다. 장군이 지은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수국에 가을빛이 저무니(水國秋光暮)/
추위에 놀란 기러기떼 높이 나는구나(驚寒雁陣高)/
걱정에 잠못이뤄 뒤척이는 밤(憂心輾轉夜)/
기우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네(殘月照弓刀).

● 찾아가는 길:경부고속도로를 타고 회덕분기점에서 부산방향으로 가다가 대진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진주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사천IC에서 내린다. 33번 국도를 달려 고성에서 14번 국도로 바꿔 타면 통영. 충무유람선터미널(055-645-2307)에서 한산도 연화도 매물도 등으로 가는 유람선이 수시로 뜬다.
*자전거 체험 프로그램(3월부터 11월까지, 무료)이 있다 문의:055-649-9202.

■이신화·『DSRL 메고 떠나는 최고의 여행지』의 저자 http://www.sinhwada.com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