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中企 밥상 차려놓자 대기업 숟가락 들고 뛰어들어”

중소기업들이 애써 차려 놓은 밥상에 대기업들이 숟가락만 들고 뛰어들고 있다.
지난 2007년 말 서울 충무로 인쇄거리는 국내 대기업 제지사의 상업용 인쇄사업 및 지류도매업 진출을 놓고 한바탕 시끄러웠다.
인쇄업종은 전국 1만6천여 업체가 3조6천억원 규모의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전형적인 소기업형 업종으로 업체당 평균 매출액이 2억원에 불과할 정도로 영세하다.
이러한 시장에 제지원료를 생산하는 대기업이 진출하겠다고 나서니 영세 중소기업들의 반발이 당연히 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쇄업계는 대기업의 사업진출 철회를 요청하는 사업조정을 신청했다.
중소기업계 반발에 부딪친 대기업은 2009년 2월 사업진출 철회를 발표했지만 그룹 내 다른 계열사를 통해 관련 중소기업을 M&A 하면서 전격적으로 사업진출에 나섰다.
인쇄업계 관계자는 “처음에야 자가소비용 물량만 수주하겠다고 하지만 값비싼 인쇄기계를 설치해 놓고 놀릴 수 있겠느냐”며 “시간이 지날 수록 사업영역 확대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중소기업들이 우려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기업 中企형 업종 진출 안가려=지난 2001년 자동차부분정비업계는 SK네트웍스와 GS칼텍스를 상대로 자동차부분정비업 진출 유예를 요청했다.
대표적인 레드오션(Red-Ocean) 시장인 경정비업은 전국에 3만4천개 정비업소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대기업의 주유소와 부분정비업의 복합경영 전략은 중소정비업계에 직격타를 입히고 있다.
특히 대기업의 정비업 진출은 주업종인 주유소의 활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 정비수요 감소 및 영세 정비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 중소정비업계의 지적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대기업의 시장진출 유형이 과거 동종 제조업 위주에서 독점적 지위 대기업이 유통 서비스업으로 진출하면서 관련 중소기업들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재생타이어 시장도 마찬가지.
2008년 한국타이어, 금호타이어가 재생타이어 시장 진출을 선언하면서 기존 중소업체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시장규모가 불과 6백억원에 불과한데도 대기업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것.
재생타이어업계 관계자는 “40여개의 중소업체들이 평균 1억4천만원의 매출을 올리며 겨우 버티고 있다”며 “재생타이어의 원료도 대기업들이 대리점을 통해 싹쓸이 할 가능성도 커 중소업체들의 경영악화가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밖에 두부, 어육연제품, 네비게이션, 스팀진공청소기, MP3, 디지털도어록, 음식물쓰레기 처리기 등이 중소기업이 어렵게 개척한 시장을 대기업이 무임승차한 대표적인 업종이다.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기존 사업영역에서 수익성이 악화돼 사업다각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이면을 보면 대부분 중소기업형 업종에 뛰어들고 있다”며 “대기업들은 좁은 국내시장에서 편안하게 장사할 생각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는데 우선순위를 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국내 30대 재벌 소속 계열사 수는 지난 2005년 3월 681개에서 올해 980개로 43%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08년 이후 2년 동안 190개가 늘어 규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대기업들이 인수합병과 사업다각화 등을 통해 사세확장에 나섰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고유업종 폐지, 中企보호막 사라져=대기업의 중소기업 사업영역 진출로 중소기업이 피해를 보는 이유중 하나가 2006년 말 중소기업고유업종제도가 폐지됐기 때문.
시장경제 원리를 통한 경쟁력 강화방안으로 고유업종제도가 폐지됐지만 오히려 대기업의 중소기업형 업종 진출 물꼬를 터준 셈이 됐다.
중소기업중앙회가 184개사를 대상으로 고유업종제도 폐지 전후 매출 변화를 조사한 결과 74.5%가 ‘감소했다’고 응답했다.
매출 감소 이유(복수응답)로는 대기업 시장참여에 따른 업체간 과당경쟁(68%), 내수시장 침체(63%), 원자재가격 급등(50.5%), 외국제품 수입증가(10.3%) 등이 지적됐다.
매출이 감소한 정도로는 30% 미만이 대부분(46%)이었으며 30~50%(28.5%), 50~80%(11.7%) 등도 나타났다.
또 중소기업 89.7%가 대기업의 중소기업 사업영역 진출이 중소기업 경쟁력 향상과 연관이 없다고 대답했다.
대기업 진출에 따른 부정적 영향으로는 출혈경쟁에 따른 중소기업 도산(76.8%)을 우선 꼽았고 대기업의 불공정거래(47.3%), 중복투자에 따른 자원배분 비효율성 증대(44.6%), 중소기업 인력난 심화(34.2%) 등을 예상했다.
특히 98.4%의 중소기업은 사업영역 보호가 필요하다고 응답했으며 중소기업 성장기회 보장(52.7%), 국민경제 균형발전(22.8%), 중소기업형 제품이기 때문(19.6%) 등으로 조사됐다.
또 고유업종 해지와 사업조정 신청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아연말의 경우 2007년 고유업종에서 해지 되자마자 원료생산업체인 고려아연이 아연말시장 진출을 선언, 사업조정이 신청됐다.
2006년 해제된 재생타이어도 2008년 한국타이어 등이 시장진출에 나서면서 역시 사업조정 대상이 됐다.
특히, 중소기업형 업종의 경우 시장규모가 영세하고 기술의 범용성 등으로 기술개발 및 시설투자가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대기업 진출시 다수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아야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사후 조정으로는 한계=중소기업형 업종에 대기업 진출시 제동걸 수 있는 제도로는 사업조정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제도.
다수 중소기업 도산과 대량실업 방지를 위해 도입된 사업조정제도는 고유업종제도와 함께 중소기업형 업종으로 적합한 사업영역에 대해 대기업을 견제하고 중소기업의 성장발전 기회를 제공하는 긍정적 효과를 거뒀다.
그러나 고유업종제도는 미리 정해진 일부업종에 대해 대기업 진입을 금지시킨 반면, 사업조정은 진입계획 또는 확장에 즈음해 대기업 진입계획을 조정하는 사후적 성격이 강해 한계가 있다.
지난 2007년 지정해제된 고유업종은 1976년 첫 도입이후 256개 업종이 지정 운영됐다.
그러나 고유업종은 대기업 진출가능성이 희박한 업종부터 해제돼 2005년 이후 해제된 업종일 수록 대기업 진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중소기업계 분석이다.
실제 2005년부터 2007년 동안 고유업종에서 해제된 45개 업종 중 아연말, 재생타이어는 사업조정이 됐으며 2006년 해제된 어육연제품, 두부 업종에는 CJ, 대상, 동원산업 등 대기업들의 사업영역 확장이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두부업종의 경우 전국에 산재한 1,800여개 중소제조업체들의 평균 가동률이 3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풀무원, 대상, CJ 등의 대기업은 자금력과 기존 유통망을 이용한 출혈 경쟁에 나서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후발 주자인 대상, CJ 등은 무차별적인 마케팅 전략을 추진, 한정된 시장에서 대기업간 과당경쟁을 부추기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자금력 등이 열악한 중소제조업체들은 경영악화가 심화가 우려되고 있다.
현재 사업조정제도는 대기업이 특정사업을 인수·개시 또는 확장할 경우 정부에서 시기를 최대 6년간 연기하거나 생산시설이나 품목축소를 권고 명령할 수 있다.
그러나 사업조정의 전 단계로 ‘사전조사제도’를 도입 중소기업의 경영난 방지와 대기업의 투자사업 포기에 따른 손실방지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정부의 권고안을 대기업들이 이행하지 않을 경우 최대 5천만원의 벌금만 부과할 수 있어 이행 강제력이 높지 않다는 것도 한계로 꼽히고 있다.
□대안은 없나=우선 정부나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 지정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 중소기업계의 목소리다.
대기업의 원천적 입찰참여가 금지되는 이같은 품목 확대를 통해 중소기업이 경쟁력 강화에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중소기업자간 경쟁제도는 지난 2007년 단체수의계약제도 폐지 이후 공공시장에서 대기업으로부터 중소기업 사업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돼 올해 196개 품목이 지정돼 운영되고 있다.
올해 새롭게 지정된 제품은 공기살균기, 고무발포단열재 등 8개 제품이며 지정제품의 공공시장 규모는 19조5천여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기업의 자발적 동참과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도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는 “시장논리에 근거, 돈 되는 사업에 모조리 손대는 대기업 행태는 자본주의 미성숙으로 밖에 볼 수 없다”며 “대기업 스스로도 사회적 책임에 동감하고 국내의 좁은 시장에서 벗어나 해외로 눈을 돌리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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