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부촌의 1번지로 알려진 성북동. 풍수지리가들은 이곳이 완사명월(浣紗明月)이라며 명당터로 꼽는다. 재벌가, 외교관저가 많지만 ‘빈부’도 함께 교차한다. 그건 차치하고 성북동 구석구석에 볼거리가 쏠쏠하게 숨어 있다. 주택가에 오롯이 숨어 있는 근·현대 서울의 문화유적들. 숨은 그림 찾듯, 고샅고샅 누비는 재미에 폭 빠져든다.

*전통 한옥의 제맛 그대로, ‘낮잠’ 즐기고 싶은 최순우 옛집

성북동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최순우 옛집(등록문화재 제268호)’이다. 주택가 골목에서 만난, 잘 지은 한옥 한 채. 최순우 선생은 가고 없지만 이곳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반긴다.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하여 ‘혜곡 최순우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 늘 가꾸고 다듬어 정갈함이 배어 난다. 최순우 선생이 30년대에 지어진 한옥을 1972년에 구입하여 1984년 타계할 때까지 살던 집. 고고미술학자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선생이 쓴 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대한 무한의 사랑을 느끼는 대목이다. 옛집에도 선생의 한옥 사랑이 여실히 녹아 있다. ‘ㄱ’자형 사랑채와 ‘ㄴ’자형 안채가 서로 만나 ‘ㅁ’자 형태로 되어 있다. 몇 편의, 시 같은 현판들, 그리고 기둥, 문창살, 댓돌 등. 한옥을 에둘러 보다 자연친화적인 뒷마당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선생이 낮잠을 즐기던 곳이라 붙여진 ‘오수당(午睡堂)을 기웃거리면서, 툇마루에 앉는다.
선생은 청죽 앞에 백자 항아리를 올려 놓고 두둥실 달 떠오르는 밤이면 푸른 대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항아리를 보며 “이보다 더 아름다운 동양화가 어디 있으랴”하며 좋아했다고 한다.
같은 공간속에서도 한없이 동떨어진 듯한 느낌. 사라질 위기에 놓인 곳을 시민들의 힘을 합쳐 만들어진 내셔널트러스트에서 관리하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 고즈넉하고 한갓진 한옥의 정취가 마음속에 쏙 스며 든다. 잠시 ‘오수’를 청하고 싶은 곳이다.

*상허 이태준의 생가는 수연산방 찻집으로, 은은한 다향이 가득

골목 비껴 나와 위쪽으로 오르다가 다시 큰 길을 만나면 길을 건넌다. 성북 다문화 빌리지 센터와 돈가스 집, 그 사잇 길로 들어서면 우측에 수연산방(壽硯山房)이 있다. 그저 찻집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집은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의 옛집이다. 우측으로 잘 지어 진 한옥. 왼쪽은 흐릿한 조명을 밝히고 있는 지붕 낮은 현대적인 건물이다.원래 대청 옆 누마루에 걸린 ‘일관정(一觀亭)’ 현판은 현재 출입문에 걸려있다. 추녀에는 절간처럼 풍경을 달았다. 조선 말기의 서울의 대표적 ‘ㄱ’자형에 안채 뒤쪽 전체에 방을 덧붙여 지금은 ‘工’자형이 되었다. 사랑방의 기능을 가진 누마루를 안채에 이어 붙이고, 부엌을 안방 뒤로 배치하고, 화장실을 안채에 부속시켜 현대에 맞춰 개조한 것이 현재의 모습.
이태준이 1933년~1946년까지 14년간 거주한 이곳은 어떤 사연이 깃들여 있을까? 선생은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해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상지대학에 수학했으며, ‘시대일보’에 ‘오몽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구인회에 가담했고, 이후 이화여전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때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인정받고 한국 문화예술계를 주도했다. 그러다 6.25전쟁 직후 월북했다. 해금조치(1988년)가 내려진 후에야 다시 알려지게 된 문인이다. 이 집에서 단편 ‘달밤’과 ‘돌다리’를 썼고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장편 ‘황진이’와 ‘왕자호동’을 썼다고 한다. 선생의 집으로 알려져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자 10여 년 전, 지인에 의해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의 찻집으로 개방된 것. 문향루에 앉아 시원함을 즐기고 싶은 곳이다.

*총독부 등지고, 햇빛까지 포기한 ‘심우장’

또 한군데는 ‘심우장’(尋牛莊, 1985년 서울시 기념물 제7호)이다. 좁고 가파르면서도 한눈에도 초루한 가옥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 부촌의 대명사인 성북동에도 이런 ‘빈민촌’이 있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그럴 위치에 심우장이 있다. 주인이 떠난 집이라서 그런 것일까? 안으로 들어서면 웬지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앞마당 오른쪽 구석진 곳에 만해(卍海)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성북구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만 올 곧게 서 있다.
만해선생의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안채를 살펴보고, 만해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현판 아래 툇마루에 앉아 상념에 빠져든다.
한용운(1879~1944) 선생은 이곳에서 1933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살았다.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거처 없이 지내다가 지인들이 북장골 골짜기에 이 집을 마련해준다. 만해가 북향집을 선택한데는 이유가 있다. 일제 총독부와 등지고 있었기 때문. 총독부에 등 돌려 앉느라 기꺼이 햇빛까지 포기한 것. 선생은 ‘조선 땅 전체가 감옥’이라며 만해는 생전 불도 때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지만 광복을 보지 못하고 생애를 마쳤다.
심우장(尋牛莊)이란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에서 유래한 것. 결국 ‘잃어버린 나 찾는 곳’인 게다.

■사진은 최순우 옛집.

-이신화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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