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세월 무심하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법정 스님이 열반한 후 길상사를 떠올린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온통 초록물이다. 황망한 도심 속에서, 성성한 푸른 잎은 눈을 싱그럽게 해준다. 뜨거운 햇살 속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그늘진 나무 밑, 벤치에 앉아 휴식 취하는 사람들의 정겨운 모습을 보면서, 경내를 살펴본다.
극락전을 지나 설법전 앞의 관세음보살상을 보고 뒤켠으로 에둘러 돌아 본다. 길상선원을 앞두고 또 다른 내림 길이다. 계곡이 있고 언덕 쪽으로 나무로 지은 건물이 여러 동. 스님들의 선방이기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오래전, 대원각이라는 요정이 사찰로 바뀐다는 보도를 접한 후 난 이곳을 찾았다. 밀실 정치의 터전이었던, ‘요정’이라는 곳을 처음 눈으로 접한 날. 우수수 낙엽 진 계곡이 멋스러웠다. 언덕 위 바윗돌 사이사이로 방갈로가 있었는데 자연 친화적이었으며 여성미가 물씬 풍겨났다. 당시 인부는 쓰레기를 불사르고 있었다. 무슨 ‘연(然)’으로 그날 그곳에 서 있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지금의 건물에서 그런 운치를 느낄 수가 없음이 아쉬울 따름. 어디로 갔을까?
연꽃무늬 낮은 돌담을 쌓아 올린, 멋진 휴식공간에서 쉬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 개울을 건넌다. 오늘의 길상사가 있게 한 ‘길상화(김영한 법명) 공덕비’를 보기 위함이다.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었고, 시인 백석을 사랑해 평생 가슴속에 묻고 산 여인.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재산 전부를 바쳐 길상사를 있게 한, 한 여인의 구구절절한 삶을 단 몇 글자로 어찌 설명하겠는가?
이내 자그마한 연못이 있어 좋은 적묵당을 보고 내려오면서 관음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유심하게 살핀다. 아치모양의 문에는 하늘 색의 학 두 마리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궁궐의 그것처럼 화사함이 배어 난다. 혹시 저 문은 대원각때부터 있었던 건 아닐까? 요정 때의 모습과 연결하려는 마음이 자꾸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저 꿰어 맞추고 싶은 속물 근성이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그런 내가 한심하다. 보호수로 지정되고 있는 느티나무를 지나서 간판도 따로 없는 찻집의 야외자리에 앉는다. 굳이 찻집 이름을 말한다면 ‘나누는 기쁨’이다. 메뉴는 대추차, 유자차, 매실차, 커피 등. 진하고 맛있는 대추차 한잔 앞에 두고 깊은 상념에 빠진다. 숭유정책을 펼쳤던 조선시대. 겉치레에 치중하고 지켜야 할 규율이 너무나 많은 시절.
특히 여자들은 ‘칠거지악’등을 내세워 거의 숨통이 터질 것처럼 짓눌리면서 살아야 했다. 그러면 조선시대에 가장 행복(혹은 자유)했던 여인들은 누구일까? 행복이라는 관념은 굉장히 주관적인 시각임을 밝혀둔다. 기생들이다. 성리학의 대가 퇴계선생에게도 연정을 나눈 ‘두향’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또 평창의 청심대는 기생 청심이가 강릉부사를 사랑하다 떠남을 애닯아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다. 황진이와 서경덕, 이매창과 허균 등을 비롯하여 부지기수다. 내 알량한 기억으로는 양반가 부인이 바람 펴 죽은 경우는 어우동 이외에는 없는 듯하다. 물론 기생들도 애환이 없었겠는가? 신분이 비천해서 늘 열등감에 시달렸겠지. 그래도 권문세도가와 어울려 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근대에 들어서도 술집여자와 대학생과의 사랑이야기는 영화로 많이 제작되곤 했다. 현실을 바탕하지 않은 영화가 어디 있겠는가? 남녀의 특별한(?) 사랑이야기는 입초시에 오르게 마련. 당시 인텔리였던 백석과 기생 ‘자야(백석이 지어준 아호)’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야기도 그렇다. 왜! 사랑하는데 헤어져야 한단 말인가? 왜! 평생 가슴에 한으로 뭍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돌고 도는 우리네 인연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 것일까? 이래저래 상념 많은 중생은 오늘도 마음이 편치 않다.
백석이 지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시를 떠올린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중략).

■●주소: 성북구 성북2동/문의:02-3672-5945-6/www.kilsangsa.or.kr./토, 일요일에 법회가 열리고 6월부터 템플스테이도 가능하다.
대중교통:4호선 지하철 이용. 6번 출구로 나와 1111번, 2112번 이용. 홍익중고 앞에서 하차해 15분 도보 거리.
별미집은 성북동 골목 즐기기편 참조하면 된다.

■사진은 관음전 전경.

-이신화·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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