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이 생겨난 것에 대해 알았으니 남촌도 궁금하다. ‘남산골 샌님’, 또는 ‘남산골 딸각발이’라고 불리던 남촌 사람들. 현재 남산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어릴 적 기억 속에 가난한 선비 허생원 이야기가 떠오른다. 집안 일 돌보지 않고 공자왈, 맹자왈만 읊어대니 부인은 속이 터져 죽을 수밖에. 그래서 허생원은 책 읽는 것을 접고 사업에 나섰고, 나름 사업수완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는 허생원 이야기.
그러면 왜 ‘남산골 딸각발이’일까? 국문학자 이희승 선생은 1952년에 발표한 그의 수필 ‘벙어리 냉가슴’에서 남산골샌님들을 ‘딸깍발이’라고 칭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의관정제하고 나막신 신고 딸깍딸깍 소리 내며 걸어가는 남산골 샌님들의 고단함을 빗대어 부른 별칭이다. 신발 없어 맑은 날에도 비 오는 날에 신는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고 한다. 나막신을 신었을 때 나는 소리를 빗대어 붙여진 것. 남산골샌님들은 북촌, 서촌의 선비들을 현실에 아부하는 족속으로 비하했다. 청렴과 지조를 밥 굶어가면서 몸으로 실천한다.
“옛날 남산골의 가난한 선비들은 선비정신은 가난 속에 오는 거여. 북촌 선비 중에 말년에 귀양 안 간 인간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5, 6공 정권 실세 중에 감방 안가 본 인간들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대통령 아들 중에 감방 안가 본 인간 있나. 선비는 현실에 관여하는 게 아냐. 무식한 것들 같으니라고. 사서삼경(四書三經)이 뭔지나 알아.”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지 관직에는 오르지 못해 가난했지만 아는 것은 많았을 듯.
지금의 한옥마을은 어떨까? 1989년 남산골의 제모습 찾기 사업에 의해 1998년 4월 18일에 개관했다. 그 자리에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었는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남별영과 남소영은 수도방위의 임무를 띤 조선후기의 군사 주둔지였다.
안으로 들어간다. 우측 건물에 문화해설사가 있고 그 앞 공터에 아이들은 지게도 짊어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더 위쪽으로 오르면 왼편에 예쁘게 만들어 놓은 연못을 만나고 그 앞쪽으로 큰 정자식 건물인 ‘천우각’ 들어서 있다. 옛날 놀이청 정자다. 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정자 우측으로 서울특별시 지정 민속자료 한옥 5개 동이 눈길을 끈다. 한옥동은 뒤로 남겨놓고 넓은 공터로 몇걸음 더 옮긴다.
굴렁쇠를 돌리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원두막에는 짚불공예가가 개량 한복을 입고 앉아 있다.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은 가족 손 붙잡고 찾아와 뜨거운 더위도 잊은 채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일석 이희승 선생의 학덕추모비를 지나 국악당을 둘러보고 타임캡슐 광장으로 오르면서 잠시 고개를 들어본다.
남산(265m) 전망대가 발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남산은 본래 목멱산이라 불리우며 조선 도읍초기부터 신성한 영산으로 여겨져 왔다. 북악산, 낙산, 인왕산과 더불어 한양의 내륙분지를 형성하던 곳. 남산은 늘 그 자리에서 사회 흐름에 대해 말없이 보고 있었을 게다.
이어 조선 건국 이성계가 개성에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지 600년을 맞아 1000년이 되는 해에 개봉해 보도록 묻어 놓은 서울타임캡슐 광장을 비껴 드디어 한옥 단지로 들어선다.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를 찾는다. 종로구 옥인동의 집은 너무 낡아 건축양식 그대로를 본떠 복원했다. 조선조 제27대 순종의 황비인 순정효황후(1894(고종 31년)∼1966) 윤씨가 13살(1906년) 나이로 동궁계비에 책봉될 때까지 살았던 집. ‘윤씨가’라고도 한다. 건축양식은 1910년대 부원군의 궁집으로 새롭게 중건된 양식으로 추정된다.
최상류층의 저택임을 알 수 있으며 일견 별궁의 면모를 보인다. 파란만장한 삶을 겪었을 조선의 마지막 황후의 사진들을 본다.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윤씨는 황후가 된다. 망국 후 일제의 침탈 행위를 경험했으며 해방과 6.25를 겪고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해 대지월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1966년 71세를 일기로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순종과 함께 경기도 미금시의 유릉에 묻혔다.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해풍부원군 윤택영(1876~1935년)댁 재실(서울민속자료 24)이 있다. 그의 딸이 동궁계비에 책봉돼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은 집(동대문구 제기동)으로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으뜸원(元)자 모양. 제일 윗터에 사당을 배치하고 그 아랫터에 몸채를 두었다. 살림집이라기보다는 재실용도에 걸맞게 돼있다. 1960년 4.19때 소실됐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부마도위 박영효(1861~1939년) 가옥(서울민속자료 18)이 있다. 서울 팔대가중의 하나로 전해지는 가옥. 개성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형으로 서울의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 소생인 영혜옹주의 부군 박영효가 살던 집(종로구 관훈동). 원래 안채,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행랑채로 이루어졌으나 안채 외에는 헐리어 없던 것을 사랑채와 별당채만 복원했다.
오위장 김춘영 가옥(서울민속자료 8)이 있다. 조선조 말기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종로구 삼청동)이다. ㄷ자형 안채에 ㅡ자형 사랑채를 연결시켜 이루어졌다.
경복궁 중건시 도편수였던 이승업 가옥(서울민속자료 20)이 있다. 1860년에 지은 집(중구 삼각동)이다. 당시는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사진은 천우각 전경.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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