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한국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가봤을 경복궁(사적 제 117호).
경복궁은 어떤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을까?
아마도 유년기, 아동기, 혹은 청소년기, 장년기에 따라 느낌이나 생각은 다를 것이다.
청소년기 소풍이나 답사 갔던 곳이라는 추억을 안고 2세 손을 부여잡고 다시 찾아보는 사람도 많다.
경복궁이 조선시대의 궁궐이라는 것 말고는 세세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늘 그 자리에 있기에 무관심하게 되는 경복궁,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경복궁 동문 입구로 찾아가는 대로변에서 동십자각(서울 유형문화재 13호)을 지나친다. 흥선대원군이 경북궁 동남쪽에 세운 망루. 건축적 가치가 있다지만 차도 안쪽에 있어 늘 눈도장만 찍고 마는 곳이다. 계단을 따라 흥례문으로 들어선다. 이어 근정문을 통과하면 넓은 근정전 마당이 나온다. 인솔자들을 쫓아 다니면서 흥미로운 얼굴로 설명을 듣는 외국인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일본어, 중국어 등 안내자의 유창한 외국어 해설소리로 왁자하다. 마치 내국인이 해외 유명 유적지를 찾아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툇마루에 앉아 조선 개국 당시를 가늠해 본다. 조선왕조를 세우고 태조 3년(1394)에 창건하고 이듬해 완성한 궁궐. 지금의 청와대가 들어선 도성의 북쪽으로 북악산이 버팀목이 된다. 광화문 광장이 펼쳐지는 전면에는 확 트인 넓은 시가지다. 동남쪽에는 청계천이 유유히 흐르고 그 앞으로 남산이 다가선다. 더 나아가면 한강이다. 궁의 왼쪽으로는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 지금의 사직공원 안에 사직단이 있다. 풍수지리의 기본인 배산임수만 알아도 명당터 임을 알게 한다. 당시 중국 도성의 건물배치 기본형식을 따라 지었다고 한다.
건물들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600년의 유구한 세월의 흔적을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깨끗하다. 그도그럴 것이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년)으로 전소됐다. 270년 동안 빈궁으로 남아 있다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이 개국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로 복원했다.
1910년 국권을 빼앗은 일본인들은 궁 안에 있는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 민간에게 방매해 버렸다. 또 1917년 창덕궁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 강녕전, 동행각, 경성전, 연생전 등을 철거하여 창덕궁의 대조전, 희정당 등의 재목으로 사용해 버렸다. 그것뿐 아니다. 정문인 광화문을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하고 근정전 정면 앞에 총독부청사를 큰 석조건물로 지었다. 자선당에도 석조건물을 만들고 건청궁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없애 버렸다. 조선정부를 완전히 해체하려는 속셈이었다.
1945년 광복 후, 총독부청사는 정부청사로 이용되다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섰다. 그러다 1995년부터 경복궁의 강녕전 교태전, 자선당, 흥례문을 복원해 나갔다. 정전인 근정전은 2001년부터 3년 10개월에 걸쳐 복원된 것이다. 그러니 경복궁의 모양새는 그대로일지라도 옛 향기야 어디 온전히 느낄 수 있겠는가?
경복궁의 역사를 알았으니 왕궁 탐험을 시작해보자. 주마간산으로 둘러 봐도 2~3시간은 족히 소요된다. 편한 신발은 기본이고 뜨거운 여름철에는 양산이나 시원한 물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물 파는 곳은 경회루 매점 뿐이다. 서울에 흩어져 있는 조선 왕궁은 거의 엇비슷한 배치다. 왕궁의 복잡한 건축구조를 일일이 다 학습할 수는 없다. 그래도 기본적인 것을 알면 궁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근정문(보물 제 812호)을 지나 근정전(국보 제 223호)으로 가는 도로가 세 줄로 이어진다. 가운데 길이 넓고 약간 올라가 있다. ‘어도’다. 왕만 다닐 수 있는 길인데 지금은 누구에게나 자유롭다. 너른 마당 양쪽에 세워 놓은 돌 품계석도 눈에 띈다. 종삼품, 정이품 등의 글자를 보면 웬지 쓴 웃음이 나오는 것은 왕 앞에서 허리를 굽신거리던 관료들의 모습이 선연해지기 때문이다. 마당에 깔린 화강암도 눈여겨 보자. 햇빛으로 인한 눈부심을 줄이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다듬어 놓은 것이다. 그 돌 사이로 쇠고리가 있다. 햇빛이나 비를 가려 줄 천막을 치는데 사용한다. 건물의 처마 밑도 고개 들어 쳐다보자. 그물이 쳐 있는데 이를 ‘부시’라 한다. 새들의 침입을 막아 건물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궁궐에는 눈에 익은 동물상들이 많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과 십이지신 등이다. 동물상들은 건물과 왕실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것들. 우리네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건물 기단 좌우 양 끝에 청동으로 만든 향로와 비슷한 물건이 있다. 백성들이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다.
우선 불귀신을 막는 ‘해치’를 광화문 입구에 세웠다. 해치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제압하는 수호신이었다. 해치가 불을 제압하지 못하고 근정전을 통과했을 때를 대비해 지붕에 화꽂이를 꽂은 ‘용두’(용은 구름을 몰고 다니며 불을 제압하는 상상의 동물)를 만들었다. 용두조차 불기운을 못 잡으면 ‘불가사리’가 나선다. 불가사리는 쇠붙이를 먹고 불길을 삼키는 수호신이다. 불가사리조차 불길을 잡지 못하면 ‘드므’가 나선다.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 불귀신이 해코지하러 왔다가 그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놀라서 달아나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근정전을 비껴 안으로 들어가면 사정전이다. 왕의 공식적인 집무실인 편전이다. 매일 아침 업무보고 회의,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양쪽으로 천추전, 만춘전이 있다. 그 뒤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있다. 교태전은 궐 안의 살림을 총 지휘하던 곳이다. 교태전 뒤에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다. 아름다운 아미산 굴뚝(보물 811호)을 눈여겨 보면 된다.
이곳까지 보고 동선상 경회루(국보 제 224호)를 찾아야 한다. 흠경각과 함원전 옆으로 나가면 길게 회랑이 이어진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은 접대하던 곳이다. 경회루 2층 누각에 오르면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중종은 폐비 신씨가 인왕산 바위 위에 올려 놓은 붉은 치마를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준 곳도 이 경회루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연이 전한다. 세종 때 교서관에 근무하던 정 9품 벼슬아치 구종직이란 자가 하룻밤 사이 종6품이 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숙직 때 몰래 들어갔다가 왕과 맞닥뜨렸고 세종이 노래를 불러 보라 했다. 그 다음날 품계를 올려 주었단다.
또 다른 사연은 연산군 때다. 연산군은 조선의 아름다운 여성을 선발해 ‘운평’이라는 기생으로 만들었다. 이들 중 궁궐로 뽑혀 온 기생을 ‘흥청’이라고 했다. 연산군은 경회루에서 흥청들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 결국 맑음을 일으키는 흥청은 맑음을 망하게 하는 망청이 됐다 해서 ‘흥청망청’의 유래가 됐다.
현재 매점, 의관을 빌려 입을 수 있는 체험관, 수정전과 궐내각사가 있다. 경회루를 에둘러 돌아보고 다시 궐내로 들어가면 자경전(보물 제 809호)이다. 자경전 벤치에 잠시 쉬면서 보물로 지정된 굴뚝과 꽃 담장 등을 관심있게 보자.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왕후에게 선물한 대비전이다.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는 고종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 대원군은 조대비의 거처를 궐 안에서 가장 화려하면서도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코자 했다.
자경전 10개의 굴뚝 중에서 십장생 무늬 굴뚝(보물 제 810호)을 만들어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조선 궁궐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건물은 고종 25년(1888)에 재건했지만 경복궁 침전 전각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건물이다.
이어 만나는 함화당과 집경당은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이다. 고종을 위해 지은 건청궁으로 가는 길목에, 아름다운 연못 향원정이 있다. 경회루하고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이곳은 아기자기 여성적인 느낌이 물씬 배어 있다.
경복궁 끝자락의 건청궁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의 장소다. 1895년 8월20일, 일본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자객들이 건청궁에 난입하여 황후를 찔러 죽이고 그 시신마저도 녹산에서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이다. 그때 자객이었던 우범선씨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낸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건청궁은 2007년 다시 복원했다. 유일하게 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궁궐 안의 궁이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불안에 떨며 살다 1896년 2월 황태자만 데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게 됐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60년대부터 경복궁 후원에는 청와대가 들어 앉았다.
건천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국립고궁박물관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지역별, 기능별, 시대별, 유형별로 전시하고 체험해 볼 수 있다. 박물관으로 관람을 끝내도 좋고 다시 경복궁으로 들어와 동궁 일원인 자선당과 비현각을 거쳐 나와도 된다.

사진은 근정전 앞모습. 마당 한 가운데는 왕이 다니는 어도가 있고, 좌우에 신하들이 걷는 신도가 따로 있었다.

■이신화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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