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경기불황으로 판로 찾기에 급급해 하고 있는 중소기업계가 이번엔 자금줄까지 막히는 위기에 몰렸다.
이는 최근 카드채부실, SK글로벌사태 등 잇따라 터진 금융불안 사태로 은행들이 중소기업 대출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콜금리를 인하하고 자금을 푸는 등 경기활성화 대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같은 금융위축 상황하에서는 정책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지점장 전결권 축소= 은행권에 따르면 대부분 은행들은 지점장의 전결한도를 종전 우량기업에 대해 최고 40∼50억원까지 허용했지만 최근 5억∼30억으로 대폭 줄였다. 각종 대출심사기능도 상당수 본점으로 넘어간 상황.
대구에서 직물을 생산하는 A사 자금담당자는 “해외바이어로부터 수주를 받아 7억원의 운영자금을 (은행에) 신청했지만 은행에선 예전과 달리 지점에서 대출심사를 하지 않고 본점으로 넘기는 바람에 제때 자금을 마련하지 못했다”면서 “현재 고이율의 사채를 이용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다.
■대출한도 줄여= 은행들은 또한 중소기업들의 신용도를 정밀 재평가하고 신규대출을 억제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은행들은 중소기업들의 매출이 지난해보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경우 대출을 중단하고 있다.
안산에서 낚시용 릴을 생산하는 B사의 경우 지난해 9월 생산품목을 고부가가치제품으로 전환하기 위해 투자를 확대했다. B사는 올들어 새로운 거래선을 뚫고 본격적인 생산활동에 들어가기 위해 10여년간 거래를 해오던 은행에 최근 대출을 신청했다. 하지만 ‘매출이 전년도 보다 크게 감소했다’는 이유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거절당해 이 회사는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고 있다.
■추가담보 요구= 은행권의 추가담보 요구와 대출금 조기상환 요구도 늘고 있다.
안산에서 볼트를 제작하는 D사는 최근 은행이 부동산 담보인정비율을 낮추고 보증인을 추가로 요청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D사 대표는 “매출이 지난해에 비해 비슷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은행이 과거 대출때 제공했던 부동산의 담보인정비율을 일방적으로 낮춰 추가 보증인을 요구했다”며 “이로 인해 거래업체나 동료사업자 등으로부터 마치 경영위기에 몰린 것처럼 오인받아 경영에 애로를 겪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흄관을 제조하고 있는 인천소재 C사 대표는 “사스(SARS)로 인해 중국 등의 수출이 중단되면서 자금이 일시적으로 막혀 2개월 연체했는데 거래은행으로부터 매출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대출금의 조기상환을 종용받고 있다”고 했다.
■은행도 할 말 있다= 은행들의 이같은 일련의 조치는 무엇보다 중소기업의 연체율이 급증하고 있다는데 기인한다.
국민은행은 지난달 말 현재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이 4.0%로 3월말(3.74%)보다 대폭 증가했다. 우리은행 역시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이 4월말 2.94%에서 지난달말 3.3%로 한달만에 0.36%포인트나 올랐다. 따라서 은행 입장으로서는 중소기업 대출축소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것.
은행들은 아울러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다. 중소기업계 애로의 근원은 경기불황에 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강력한 노력 없이 금융권에 비난의 화살이 몰린다는 것이다.
우리은행 서동면 부행장은 지난 12일 중소기업계 대표와 금융계 대표와의 간담회에서 “중소기업의 자금사정이 어려운 것은 은행만의 탓이 아니라 경기가 전반적으로 나쁘기 때문”이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투자를 유도, 중소기업 재고율을 떨어뜨리는 정책적인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해결책 없나?= 콜금리 인하, 부동산투기억제, 기업투자활성화방안 발표 등 정부가 최근 경기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은행이 자금을 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난 97년말 외환위기 직후 금융기관 임직원들에 큰 부담을 줬던 ‘부실대출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는 방안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직원들에게 “소신껏 일해라”고 해놓고 간혹 발생하는 금융사고에 검찰이 들이닥쳐 수천건의 자료를 압수해 업무를 마비시키는 사태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것이 금융권이나 중소기업계의 공통된 입장이다.
또한 은행권의 인센티브를 높이는 방안도 제기되고 있다. 이의 일환으로 中企 대출비중이 높은 은행에 연 2.5%짜리 저리자금(총액한도대출)을 확대·배정하자는 목소리도 높다.
신한은행 조우섭 부행장은 “지난해부터 대부분 은행들은 중소기업 대출을 대폭 늘렸지만 총액한도대출의 전체규모는 크게 늘지 않고 있다”면서 “은행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는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밖에도 전문가들은 ▲기업의 재무구조를 부채비율 200% 이내로 맞추도록 한 규제 재검토 ▲은행권의 중소기업 의무대출비율을 45%에서 50%대로 높이는 방안 등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대책은 단기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 진정한 해결책은 은행들이 담보대출 관행에서 벗어나 기업들의 신용과 업력, 기술력 등을 제대로 평가하는 선진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있다는 것이 중소기업계의 한목소리다.
경기도 양주에서 식품제조업을 운영하는 ㅈ사장은 “20년 넘게 기업을 해오면서 부도위기까지 몰리면서도 한번도 은행에 연체해 본 일이 없지만 지금와서 보면 은행의 대우는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한국종합전시장(COEX) 초대 사업이사를 역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 의류사업을 하고 있는 최인규씨(72)는 “미국에서는 철저한 신용사회로 신용만 좋으면 200만불까지 무보증, 무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다”면서 “한국의 수많은 교포들이 이 제도를 활용, 사업을 벌여 신용을 쌓고 부를 축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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