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하게 대기 온도가 높아가고 있다. 금방이라도 파릇한 새순이 솟아날 것 같다. 웬지 몸이 근질근질하다. 무엇인가 동적인 행위를 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이 따사로운 해빙기 햇살이 차라리 얄미울 지경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돌파구는 무엇일까? 가볍게 움직여 주어야 한다. 주섬주섬 봇짐 챙겨 동구릉을 찾는다. 큰 목적은 없다. 단지 잊어버린, 빚바랜 사진첩 한 장을 끄집어 내고 싶을 뿐이다. 접근하기에 가깝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묘자리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중시했다. 묘를 잘 써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전설, 설화도 많이 있다. 묘는 묘지만 왕과 황후는 능이라 부른다.
조선시대의 묘제는 능, 원, 묘로 구분되어 있다. 능은 황제 혹은 황후의 무덤이며, 원은 황제의 사친, 황태자의 무덤을, 묘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말한다. 주로 한양(서울)을 기점으로 40km 안에 조성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선의 왕릉 군이다. 한마디로 조선 시대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좋은 역사 체험장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왕릉은 태조의 건원릉 이하 44기에 달한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왕릉은 40기. 이 가운데 태조의 신의왕후 능인 제릉과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은 북한에 있다. 그 중에서 9개의 무덤이 동구릉(사적 제193호, 구리시 인창동 산 2-1)에 몰려 있다.
동구릉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다. 조선 1대 태조(이성계)가 안치된 건원릉(인창동 산 4-2), 5대 문종의 현릉, 14대 선조의 목릉, 16대 인조의 휘릉, 18대 현종의 숭릉(비공개), 20대 인조의 휘릉, 21대 영조의 원릉, 24대 헌종의 경릉 그리고 순조의 수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철종 6년(1855)때 9번째로 익종의 수릉이 옮겨오기 전까지는 동오릉, 동칠릉으로 부른 사실이 실록에 적혀 있다.
엇비슷한 9개의 능을 다 둘러보지 않아도 된다. 특징은 제각각 조금씩 다르지만 건원릉과 헌릉 정도로만 만족할 생각이다. 매표소를 지나 오른쪽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으레 그렇듯 홍살문이 지나친다. 능마다 설치되어 있는 홍살문이다. 이내 수릉과 현릉을 지나친다. 길목과 야산 주변에 소나무가 있지만 그다지 수령이 오래되지 않아 보인다. 이유는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새로 심어졌기 때문이다.
왕릉을 만드는데는 여러 격식이 따른다. 태조(1335년 출생)는 태종 8년(1408) 5월 24일, 그의 나이 73세때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숨을 거뒀다. 그해 6월 28일, 당시 영의정 하륜등이 이곳을 무덤지역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곳에 서서 주변 산세를 살펴보면 명당터임을 알게 해준다. 좌청룡 우백호가 훤히 잡히고, 왕이 머물렀다고 하는 왕숙천이 아늑하게 흐른다. 정면으로는 검단산이 아른거려 완벽한 풍수지리 교과서를 보는 듯하다.
터를 잡은 후에는 7월 5일 충청도, 황해도, 강원도에서 군정 약 6,000명을 징발하여 7월 말부터 역사를 시작하고 석실을 만들었다. 9월 7일 태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가 견전례를 행하고 발인했다.
그런데 건원릉이 여느 것과 다르게 독특한 점이 있다. 마치 봉두난발을 한듯 억새가 빼곡하다. 다른 왕릉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이 무성하다. 이는 고향을 그리워했던 아버지를 위해 태종이 태조의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태조가 애지중지 사랑했다는 신덕왕후(두 번째 부인 강씨)는 멀리 정릉에 따로 있다. 묘를 쓰는 자는 아들이었으니 의붓 어머니의 사랑하는 아들은 없으리.
어쨌든 조선초기 능은 고려시대의 왕릉과 많이 닮아 있다. 건원능도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릉(현릉)을 본떠 만들었다. 대신 고려시대 왕릉에는 없던 곡장(曲墻:나지막한 담)이 봉분 주위를 두르고 있다. 묘역을 지키는 석물들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또 눈여겨 볼 것은 봉분을 두르고 있는 석벽의 12지를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다. 봉분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는 왕을 지키는 영물인 석호와 석양을 4개씩 교대로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 뒤쪽 무덤 앞에 놓은 직사각형의 돌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하는 것이라 한다)이 있다.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鼓) 모양의 고석(鼓石) 5개가 놓여 있다. 봉분 아랫단에는 석마가 한 필씩 딸린 문인석 1쌍이 있고, 그 아랫단에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인석 1쌍이 마주 서 있다. 도저히 도굴이 불가능할 듯한 구조다.
어쨌든 건원릉을 보고 현릉(인창동 산 6-3번지)에 오른다. 조선 제5대 왕 문종(1414~1452년)과 문종의 부인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1418~ 1441년)의 무덤이다. 합장릉이 아니라 이 부부는 멀리도 떨어져 있다.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묘역을 지키고 있는 석상들은 건원릉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병을 얻어 세종 23년(1441), 문종보다 11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안산의 소릉에 묻혔다. 단종 복위사건에 의해 세조 3년(1457) 추폐되었다가 중종 7년(1512) 복위되었다.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으로 이장되었다. 살아 있는 자들의 이권, 감정 개입이 점철된 조선의 왕릉에는 우여곡절이 만만치 않게 많다.
어쨌든 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숭릉 순으로 둘러보면 된다. 숭릉과 목릉은 야생조수보호 등의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다. 또 산책길 중간에 양묘장과 자생식물포가 있어 우리의 자생식물 꽃을 덤으로 감상할 수 있다.
자연학습장길은 총 2km로 천천히 산책하는 데는 왕복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따라서 왕릉과 자연학습장 길을 모두 둘러보는 데는 총 3시간 정도 잡으면 넉넉하다. 사진은 건원릉.

여행정보
○여행포인트:실제적으로 여행을 하려면 한 지역을 선택해서 꼼꼼히 즐기면 좋을 듯하다. 이 계절에는 서천과 군산 쪽이 적격하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해 군산 나들목이나 서천을 이용하면 된다. 공주 금강줄기변에는 장어집들이 남아 있다. 또 서천의 금강줄기의 민가에 들르면 전통주인 소곡주를 아직까지 빚는 집이 있다. 하루종일 앉아서 마시다 다음날 봇짐까지 잃는가 하면, 과거 길에 오른 선비가 한산지방의 주막에 들렀다가 소곡주의 맛과 향에 취해 한두잔 마시다 과거 날짜를 넘겼다고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한다. 백제가 망한 뒤 백제 유민들이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소곡주를 빚어 마셨다는 얘기도 있다. 또 군산은 회등 먹거리가 유명한 지역이다.
○여행시기:해마다 6월 27일에 건원릉친향기신제를 연다. 주요 행사로 어가행렬 재현, 건원릉친향기신제, 시민백일장, 성년례 재현 등이 펼쳐진다. 어가행렬은 400여 명이 참여하는 총 500m에 달하는 규모로 체육관에서부터 동구릉까지 3㎞를 행진한다. 이를 위해 왕과 세자를 뽑는데, 왕은 40~60세의 구리시민 중 왕의 위상과 풍모가 있는 남자, 왕세자는 10~15세의 구리시민 중 남자가 선발된다. 뽑힌 왕과 왕세자는 다음 왕과 왕세자가 선발될 때까지 어가행렬 및 관련 행사에 왕과 왕세자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며, 시 홍보대사 자격이 생긴다.

■이신화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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