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재 지킴이

‘간송미술관’은 국보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다. 1938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한 사립박물관으로 전형필은 10만석의 추수가 가능한 땅과 재산을 상속받은 조선 최고의 부자였다. 그는 전 재산을 털어서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데 평생을 바친다. 당시 일제는 우리 문화재를 반출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 와세다대 법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미술품 애호가인 오세창의 영향을 받아 서울 관훈동에 ‘한남서림’을 세우고 우리 문화재 수집에 나섰다.
전형필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의 그림 등 회화작품들과 서예 및 자기류, 불상, 석불, 서적 등에 이르기까지 국보급 문화재를 거금을 들여 사들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고려청자 하나에 기와집 10채 값을 왜 지불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인들에게는 ‘금싸라기 땅을 팔아 사기그릇을 사는 바보’로 비쳐졌고, 일본인들에게는 ‘나라도 없는 주제에 골동품을 모으는 놈’으로 무시를 당했다. 사실 나라를 잃고 언제 해방될지도 모르는 시대에 수만금을 주고 우리 문화재를 모았다는 사실은 우리 문화를 지킨다는 사명감과 독립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청자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를 사들일 때의 일화를 보자. 전형필은 그 고려청자를 거금 2만원에 사들였다. 경성에서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군수의 한 달 월급이 70원, 쌀 한 가마니가 16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도자기의 가치를 알아 챈 일본인 도자기상이 찾아왔다.
“이 물건 사신 값의 두 배를 지불하겠습니다.”
그러자 전형필이 말했다.
“당신이 이 천학매병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이 도자기는 원금 그대로 가져가십시오.”
“앗!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을....”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원형 가운데서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46마리의 백학과 그 원형 사이에 무수히 흐르는 구름을 사이로 날아가는 23마리의 백학을 새겨 넣었는데 69마리가 아닌 수천마리의 학이 구름 속을 노니는 형상으로 신비감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려청자였다. 그 일본인은 그보다 좋은 도자기는 구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터덜터덜 돌아갔다.
국보 제1호로 지정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을 구입할 때 전형필은 그 가치를 인정해서 부른 값의 열 배를 주었다. 그리고 해방될 때까지 이것을 비밀로 하다가 해방 이후 공개했다. 6·25때는 훈민정음을 품에 넣고 피난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 삼아 베고 자면서 지켜냈다. 훈민정음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현재 간송미술관은 국보 12점과 보물 10점을 보유하고 있고 수천 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데 전형필이 한 번 구입한 문화재는 절대로 팔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돈벌이를 위한 문화재 수집이 아니라 문화재 보호와 연구를 위한 사명감으로 그 일을 했던 것이다. 전형필은 해방 이후에는 예전처럼 문화재를 수집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라가 독립했으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우리 문화재가 이 땅에 남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