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부터 시작된 국민연금의 적립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작년 말에 이미 324조원에 이르렀고, 2043년에는 2500조원으로 증가가 예상된다. 이렇게 규모가 커지자 국민연금의 운용방식이 국민들의 노후대비를 넘어 금융시장의 질서, 나아가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핵심변수가 될 조짐이다.
국민연금은 2010년 말 현재 적립금의 17%인 55조원을 국내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삼성전자, POSCO, KT, KB금융, 신한금융 등 139개 국내기업에 대해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주식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며, 규모가 더 커지면 그 파워가 폭발적으로 커질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따라서 국민연금을 비롯한 각종 연기금이 주주권을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 해당 기업의 운명과 산업구조까지 바꾸어 놓을 가능성이 높다.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가 최근 큰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문제 제기가 정부 주도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회 곽승준 위원장이 지난 4월 “대기업들의 거대 관료주의를 견제하고 시장의 취약한 공적기능을 북돋울 수 있는 촉진자(catalyst)가 필요한 상태”라 언급하며, 주주권을 가진 연기금을 언급하였다.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의 파장

재계에서는 즉각 ‘연금 사회주의(pension fund socialism)’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다른 편에서는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선진 자본주의로 가는 길이며, 일부 대기업들의 잘못된 행태를 바꾸어 놓을 유효한 수단이라는 찬성론을 펴고 있다. 여기에서 양 주장의 시비를 논할 생각은 없지만, 이 쟁점과 관련하여 연기금, 정부와 대기업 측에 다음의 당부를 드리고 싶다.
먼저 국민연금은 스스로가 국민들의 신뢰회복에 힘쓰는 한편, 본래의 목적 수행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국민연금은 임금의 9%(근로자와 기업주가 4,5%씩 부담)를 떼어 강제저축을 하는, 전 국민의 노후대비 적립금이다. 따라서 투자를 결정할 때 수익성과 안전성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원칙 하에 주주권이 행사되어야 하며, 정부의 관치금융의 도구로 전용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기금운용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돼야 할 것이다. 국민연금이 재무적 투자자로서 기업 가치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의결권이 행사되도록 하는 전담기구의 설치 내지 ‘‘주주권 행사 위원회’의 구성이 요청된다.

대기업의 자율적 노력이 관건

다음으로 정부의 대기업 정책은 도덕적 설득과 자율성을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곽위원장이 지적했듯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부족, 중소기업 업종으로의 문어발식 확장,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미흡 등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문제를 초과이익 공유제나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등 무리한 정책수단을 동원해 해결하려는 자세는 찬성할 수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며칠 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은 법이나 제도로 강제한다고 되지 않고,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하는 게 좋다”고 강조한 것은 정곡을 찌른 말이다.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인기 영합적 정책들이 양산되는 것을 크게 경계해야 한다. 오히려 반(反)기업정서의 불식과, 시장친화적인 기업 환경 조성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국민들의 강한 신뢰를 끌어내야 한다.
끝으로 기업인, 특히 대기업과 그 총수들이 존경받는 기업인, 사랑받는 기업 만들기에 더욱 매진해 주길 바란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부자가 부러움의 대상이지,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부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확고히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창의와 혁신의 경영은 물론, 정도경영(正道經營), 윤리경영(倫理經營)의 기반을 튼튼히 마련해야 한다.
사상 최대의 순이익이 협력업체나 중소기업의 일방적 희생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회사 돈으로 많은 기부를 하기보다는,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이나 손정의(孫正義)처럼 개인의 재산으로 베품의 문화를 창조하고 ‘따뜻한 시장경제’의 위력을 보여주어야 하겠다.

최용호
(사)산학연구원 이사장,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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