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5월14일 미국 파견을 앞둔 ‘전기통신기계공업전문시찰단’. 이 시찰단에는 파이오니아 전기 사장을 비롯한 중소기업 경영자 12명이 출발 6개월 전부터 현지에 가서 중점적으로 파악할 내용과 일본 산업계 현황을 꼼꼼하게 수집했다. 일본내 전기통신기계공업 현황조사를 실시한 것은 물론 각종 세미나를 개최해 문제를 명확히 끄집어냈다.
18개에 이르는 동종업계 공장을 일일이 방문하면서 미국 현지에서 조사해야 할 항목들도 추렸다. 이러한 꼼꼼함은 그해 5월15일부터 6월21일까지 한 달 남짓 미국을 둘러본 보고서로도 이어졌다.
정리한 자료만 4천여 페이지. 이를 추려서 작성한 최종 보고서는 175페이지에 달했다. 시찰단이 작성한 보고서 원본은 단장 소속사인 파이오나아사에서 보관했지만 사본을 일본생산성 본부를 통해 일반에 공개했다. 이같은 철저한 사전조사와 사후 공유는 일본 기업들의 선진기업 벤치마킹 성공률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동안 경제를 지탱해온 일본 강중기업. 1990년대 이후 일본경제를 사실상 견인해 온 것은 대기업이 아닌 이들 강중기업이다. 부품, 소재, 장치산업에 폭넓게 포진해 있는 이들 강중기업은 어떻게 강한 경쟁력을 갖게 됐을까?
 

벤치마킹 전후 준비·공유 철저

일본 강중기업에서 발견되는 첫 번째 특성은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벤치마킹이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는 앞선 서구의 문물에 대한 철저한 벤치마킹이 커다란 역할을 했고 이같은 유전자가 여전히 녹아있다. 메이지 유신 직후, 거의 2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 등 12개국, 132개 공장을 견학한 이와쿠라 사절단이 좋은 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일본이 그토록 빠른 시간 안에 회복기조로 전환하게 된 것은, 미국을 철저하게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1955년 일본정부는 ‘재단법인 일본생산성본부’를 설립했다. 이 재단의 주요사업은 해외에 산업시찰단을 파견하는 것으로 발족된 지 불과 2년 사이에 45회에 걸쳐 540여명의 시찰단을 파견한 기록이 있다.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본이 대규모로 시찰단을 파견했다는 사실 그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일본 산업계에 뿌리내리게 됐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성공한 기업을 벤치마킹해 따라 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들의 벤치마킹 성공률이 높았던 이유는, 그만큼 철저한 사전준비와 사후공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반기술·인력 효과적으로 활용

일본의 강중기업뿐만 아니라 일본 산업계는 軍에서 배양된 기술과 인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특징이 있다.
1964년에 개통된 도까이도(東海道)신칸센은 해군 항공기술그룹의 역량이 결집된 것이었고, 전후 최고의 카메라회사인 ‘라이카’를 제치고 35미리 카메라를 만들어낸 니콘은 군함의 거리측정기를 만들면서 축적한 고도의 광학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 전자시계는 대포의 신관기술이 응용된 것이고, 자동차나 오토바이의 엔진은 항공기 엔진기술을 응용한 것이다. 소니의 창업자 중 한사람인 모리타 아끼오씨는 해군 기술중위 출신이고, 일본빅터, 파나소닉 등의 회사에서도 많은 해군의 기술관 출신들이 활약 했다.
 

‘Only One’고집 한 눈 팔지 않아

마지막으로, 일본의 강중기업들은 대부분 한 우물을 끝까지 팠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전자소재 및 기록매체의 강자 TDK는 페라이트라는 자성체 하나를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이고, 반도체노광기의 강자 니콘은 광학기기라는 한 분야를, 플랫판넬 TV용 성막장치 세계 No.1기업 알박은 ‘진공’분야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기업이다.
실제로 전자기기용 유리기판의 강자 아사히글라스사의 한 중역은 일본의 전자재료메이커가 왜 강한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디지털 소재에 성공한 기업들은 특화된 ‘Only One’ 기술을 갈고 닦아 왔을 뿐 아니라 절대 한눈을 팔지 않고 어떠한 유혹에도 결국 본업으로 회귀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심지어 한 일본의 전자재료산업 관련 전문가는 “한국기업은 대부분 단기업적주의인데다 인내심이 적어서 앞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이 분야만큼은 일본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지적 했다.
물론, 요즘과 같은 변화의 시대에는, 한 우물을 파기보다는 조금 파보다가 안될 것 같으면 빨리 다른 곳에서 승부를 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의 강중기업들, 특히 소재 관련 기업들은 목표 없이 한 우물을 판 것이 아니다. 이들 기업은 자신들이 가진 강점 및 핵심역량을 기반으로 연관산업 다각화에 성공한 경우로 국내 중소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병하
삼성경제연구소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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