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왜 이럴까?
장마라긴 하지만 하늘이 지독하다.
하늘 뚫어진 것은 아닐까?
억수로 내린 비는 도로에 금세 작은 도랑을 만들기 일쑤다.
이 비 그치면 어디를 가야 하나? 휴가? 그것조차 귀찮고 힘겹다.
가까운 곳으로라도 마실 나가듯이 가긴 가야지.
반짝 해가 비치는 날, 봉선사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교통체증이 심하긴 하지만 가볍게 나들이하기 좋은 곳 아니던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일주문을 비껴서자마자 우측 비석단지를 찾는다. 춘원 이광수 선생 기념비를 찾기 위함이다. 이곳에 왜 이광수의 기념비가 있을까? 평안북도 정주 출생인 춘원 이광수는 11세 때, 콜레라로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가세는 기울고 머물 곳 없던 그는 제법 잘사는 친척인 재당숙집에 머물렀다. 그때 당숙집 외아들이 이학수(운허 스님)였다. 이후 천도교의 박찬명 대령 집에 기숙하며 서기 일을 맡아보다가 1905년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도 하고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또 상해에서 안창호의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썼다. 1921년, 상해 독립신문을 사임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친일노선을 걷게 된다.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을 시점인 1928년 8월 금강산 여행 중이던 춘원과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던 운허스님을 만나게 된다. 이광수의 ‘금강산유기’에 보면 두 사람은 만나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운허스님은 변절자 낙인과 차남 봉근의 죽음등으로 고뇌하는 이광수에게 ‘법화경’ 한 질을 선물했다. 그뒤 춘원은 법화경과 불교에 심취해 스스로를 ‘법화행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1941년부터 사능에 칩거해 있는 동안 해방이 되었고 춘원은 신변의 위협으로 어디론가 피신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그해 봉선사로 입산하게 되었고 법화경을 탐독하면서 죄인의 심정으로 돌베게를 베고 살았다. 그 때문에 입이 돌아가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그의 진지한 내면을 담은 ‘돌베개’라는 수필집이 만들어졌다. 1946년에는 운허 스님 주선으로 광동학교의 선생이 되어 한동안 작문과 영어를 가르쳤고 교가도 만들었다. 운허스님은 봉선사 내에 춘원이 기거할 수 있는 방(다경실)을 내줬다.
한국전쟁이 나자 서울 집에 잠시 돌아갔다가 북한군에 납치돼 이후부터는 소식을 모르게 되었다. 1975년 주요한 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이 봉선사에 기념비를 세우자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비석에는 그가 남긴 글 중 일부를 빼곡히 새겨 놓았다. 한사람의 인생역정을 그저 연도 따져 이력만 나열한다고 해서 어찌 이해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안으로 들어가면 봉선사다. 고려시대 광종 20년(969)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해 운악사라 했다. 그 후 예종 1년(1469) 정희왕후 윤씨가 광릉의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가 오늘에 이른다. 중종의 부인인 문정왕후에 의해 불교가 다시 중흥의 시기를 맞게 되는데 그때 강남의 봉은사는 선종수사찰, 강북의 봉선사는 교종수사찰이 된다.
그래서 승과고시를 각 절 앞에서 보게 되었는데 이때 장원급제자가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이 있었다. 봉선사 입구에는 스님들이 과거시험을 봤다는 장소에 ‘승가평터’라는 돌비석이 있다.
1911년, 전국 사찰을 31본산 체제로 나눌 때 교종 본산으로 지정되어 경기도 내 23개 사찰을 관장하게 되었으며 1968년 대한 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가 되어 17개 지역 72개 사찰을 관장하는 봉선사는 불교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뒤에는 일본치하에서도 당당했던 월초스님, 그의 손상좌 운허스님, 운허스님의 제자 월운스님이 있었다.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을 큰법당이라고 한글로 쓰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불교 대중화에 힘써왔던 운허스님이 1969년 대웅전을 중건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편액을 내달았다. 여러 건물과 대종(보물 제397호)이 있다. 사찰 뒷길 따라 호젓한 등반을 하거나 사찰 앞에 연꽃이 만발한 호숫가 주변에서 오수를 즐겨도 좋다.
또 봉선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광릉(사적 제197호, 진접읍 부평리 247)이 있다. 광릉은 조선 7대 세조(1417~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능이다.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돌방을 만들지 않고 회격(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처리했다. 간소하게 능을 조성함으로써 부역인원과 조성비용을 감축하였다. 이후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또 89년 개장한 국립수목원이 있다. 150만 평에는 2844종의 다양한 식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문수목원, 산림동물원, 산림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다. 희귀동물과 천연기념물인 크낙새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수목원은 광릉숲 보전을 위해 지난 97년부터 토, 일요일, 공휴일, 국경일에는 완전 폐쇄한다. 평일에는 5일전에 전화, 인터넷 통해 예약한 단체나 개인에 한해서만 입장 가능하다.
여행정보
○ 봉선사 :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문의:031-527-1951~3, http://www.bongsunsa.net/, ○ 광릉 : 진접읍 부평리 247, 031-527-7105, 관람시간:3월~10월:09:00~18:30, 11월~2월:09:00~17:30, 휴관일:매주 월요일, 관람요금:어른:1000원, 어린이:500, ○ 국립수목원 : 부평리 산 99-1, 문의:031-540-1030, http://www.kna.go.kr
*봉선사에서는 연꽃축제(7월 22일~23일)가 열린다. 또 매달 템플스테이도 가능하다. 예불, 108배, 발원문 쓰기, 명상, 발우공양, 차담, 울력 등을 체험하게 된다.
○ 자가용 : 외곽순환도로 → 퇴계원IC → 퇴계원, 이동방향 → 47번 국도 → 장현 → 검문소 → 광릉 수목원 팻말따라 98번 지방도로 좌회전 → 봉선사 → 광릉 → 수목원
또는 서울 미아리 → 의정부 → 43번 국도 → 축석고개 → 국립수목원 → 광릉(33㎞)
서울(석계역) → 태능 → 퇴계원 → 광릉내입구 → 광릉(30㎞)
○ 대중교통 : 청량리역 환승센터 제일 바깥쪽 라인에서 7-5, 707번 버스가 수시로 운행. 광릉내에 하차 후 21번 의정부행 버스 이용. 동대문에서 106번 버스 이용해 의정부. 구시외버스터미널에서 광릉내행 21번 버스 이용. 30분~40분 간격으로 운행.
○ 추천 맛집 : 크낙새가든(031-527-7244, 장어구이, 부평리), 광릉돌솥밥(031-528-2828, 솥밥 전문, 팔야리), 플레르(031-571-9097, 양식, 장현리) 등이 있다. 수목원 인근인 포천시 소흘읍에는 광릉불고기(031-527-6631, 불고기), 수목원가든(031-544-7760, 갈비)등이 있으며 고모리 카페촌을 이용하면 된다.

■글-사진 : 이신화 http://www.sinhwada.com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