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나가와 현 치가사키. 인구 23만명의 소도시에 세계적인 전자업체의 임원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바로 이곳에 알박(ULVAC)이라는 기업이 있기 때문이다. 알박은 액정패널 유리기판에 전극과 배선을 얇은 막으로 만드는 장치, 즉 액정 TV용 성막장치 세계 1위 기업이다. 또 플라즈마 TV용 성막장치에서도 시장점유율 60% 이상을 기록, 연간 2조원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고 있다. 이같은 회사도 알고보면 후발주자로 출발했다는 점이 다소 독특하다.

선각자의 안목으로 탄생

1950년대 초 어느 날, 파나소닉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를 비롯한 기린맥주, 일본생명 등 내로라하는 일본의 기업가 여섯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마쓰시타가 말했다. “미국에 가보니 진공기술이 뜨고 있던데, 내가 보기에 잠재력이 큰 기술인 것 같습니다. 일본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머지 다섯 명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 각자 백만 엔씩 사비를 출자하기로 결정했고, 그 돈은 동경대 연구실 소속의 어느 진공 관련 기술자에게로 전달됐다. 그 결과 1952년 일본진공기술이라는 진공펌프 회사가 탄생했다.
초기의 알박은 진공기술자들이 만든 회사로 주 생산품은 농축쥬스나 소주 등의 액체를 정제하는 진공장치와 농산물 진공동결 건조장치 등이었다. 그러다 1970년대, 가전제품 제조공정에 사용되는 진공알루미늄 납땜장치를 개발하면서 전자산업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80년대 반도체 붐이 일면서 진공설비, 클린룸 등 진공기술 기반의 제조장비 업체로 변신에 성공했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액정디스플레이용 제조장치, 플라스마TV용 제조장치까지 개발하며 세계적인 전자장비업체로 성장했다. 처음 진공기술의 가능성을 말했던 마쓰시다조차 이렇게까지 이 기술이 중요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기술의 잠재력을 알아보는 안목만큼은 탁월했던 것이다.
일본의 진공기술 1호 벤처에서 반도체장비 시장의 스타가 된 알박이지만 풀리지 않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진공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진공기술의 원산지인 미국기업과 비슷하다는 것이지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반도체 장비업계에는 먼저 그 시장에 진입한 어플라이드 머티리얼(Applied Materials)이라는 거인이 있었다. 진공기술로는 선도자를 압도하기 어렵다면 결국 + α 기술, 즉 진공에 또 하나의 기술 차별화를 더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알박은 생각했다. ‘고객은 왜 우리 장비를 살까? 전자부품을 만들기 위해 산다. 부품은 전자재료로 만든다. 따라서 우리가 재료의 특성을 더 잘 반영한 장비를 만든다면, 틈새시장이 생길 것이다!’ 알박의 재료기술 강화전략은 주효하여 고객 특성을 잘 이해하는 장비업체라는 명성을 얻었고, +α인 재료기술 기반으로 지금의 액정 TV 성막장치 1위까지 이르게 된다.

후발주자 약점 차별화로 극복

알박의 차별화 모색은 고객밀착형 전략으로 이어진다. 경쟁사들은 고급기술 유출을 우려하여 신제품 개발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알박은 고객 상황에 맞는 재료특성을 반영하려다 보니 제품개발 자체를 고객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고객 맞춤 정도가 높아져 신뢰관계가 강화되고, 상호신뢰는 보안문제도 해결해 준다. 2000년부터는 아예 생산공장을 한국에서도 운영하는 점은 알박의 고객밀착 전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알박의 신제품개발 전략이야말로 경쟁사와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인데, 알박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상명하달식 기술개발로는 한 순간의 판단실수로 세상의 흐름을 놓치게 되니 최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시도해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후발업체가 빠지기 쉬운 딜레마는, 노력하면 시장에서 선두그룹으로 바짝 다가갈 수는 있으나 아예 시장을 압도하는 건 어렵다는 점이다.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알박처럼 선도업체의 기반기술에 나만의 차별화 기술을 섞고, 고객과 더 밀착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미래시장을 준비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을까?

김원소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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