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릉은 조선 제6대 왕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의 비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사적 제209호)이다.
정순왕후는 중종 16년(1521년 6월 4일)에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소생이 없어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시가의 묘역에 묘를 만들었다.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던 단종은 숙종 7년(1691)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이때 정순왕후도 복위되었으며,
무덤은 사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평생 단종을 사모했기에 붙여진
사(思)릉이다.
봉선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릉이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간과하는 것들이 많다. 정작 일상의 내 삶에서 역사의 한 인물은 필요치도, 중요치도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계기가 생겼다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연히 드라마 한편 본 것 뿐인데 그 뒤가 궁금한 것처럼 말이다. 역사 속 인물이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인들의 사생활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배불리 잘먹고 잘살았어 하면 별로 얘깃거리가 없다. 파란만장, 구구절절 사연 많고 비껴갈 수 없는 운명 속에서 산 인생들은 한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된다.
단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그저 힘 좋은 삼촌, 세조에 뒤밀려 가장 짧게 왕좌에 머물렀다 사약 먹고 돌아가신 분이라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당했다가 사약 받고 돌아가셔 장릉에 모셔져 있다는 정도다. 그런데 한번이라도 단종 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던가? 중종의 폐비 신씨는 인왕산 치마바위로 많이 알려졌지만 단종비 정순왕후의 삶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 그녀의 인생이 궁금하다.
정순왕후(영조비와 이름이 같아서 헷갈리는 사람도 많다)는 여산 송씨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세종 22년, 1440)로 태어났다. 단종 2년(1454), 15세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세자나 세손이 아닌 정식 왕과 결혼한 최초의 왕비다. 세종의 첫아들 문종은 아들 하나, 딸 둘 낳아 놓고 즉위 2년 4개월 만에 명을 달리했다.
단종(1441~1457)은 불과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수양대군은 문종의 동생이다. 조카 단종을 보위해 왕실을 굳건히 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을 들고 계유정란(1453년 10월, 단종 3년)을 일으켜 영의정으로 실권을 쥐었다.
또 1455년 동생 금성대군과 종친들을 죄인으로 몰고 유배시킨다. 어린 왕은 수렴청정을 해 줄 어머니(동구능 내의 현릉, 현덕왕후)는 물론 할머니도 없었으므로 자연히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실세는 김종서와 황보인 등 상왕의 명을 받은 권신들 뿐이었다. 위협을 느낀 단종은 결국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긴다. 수강궁으로 나올 때에 왕비 송씨와 후궁 김씨, 권씨, 시녀 3명, 모두 여섯이 단종을 모시고 나왔다. 단종이 상왕의 자리에 오를 때는 정순왕후는 의덕대비에 봉해졌다.
하지만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의 상왕 복위사건이 일어나면서 1457년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0월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았다.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귀양 가던 날 정순왕후는 청계천 영도교까지 배웅 나왔다. 여기에서 이별했다 ‘영영 이별한 다리’라 하여 영도교(永渡橋)라고 했다는 야사가 전해온다. 그렇게 이별한 후 그녀는 현재 동대문 밖 숭인동 산기슭인 정업원(현재 청룡사)에 머문다. 임금만 바라보고 궁에서 살았던 궁인들은 갈 곳이 없어 비구니 절에서 ‘업을 닦으며’ 살았다. 고려조 공민왕비 혜비(이제현의 딸)도 공민왕 사후에 이 절로 출가를 했다.
이어 태조 이성계의 셋째 공주인 경순공주도 태종 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친 오빠 방번, 방석이 살해되자 이 절에 일생을 의탁했다. 결혼한 적이 없는 궁녀들도 의탁할 곳이 없을 때는 절에 들어갔다.
정순왕후도 비구니가 되어 자신은 허경(빈 거울), 세 시녀는 희안, 지심, 계지라는 법명으로 일생을 마음 공부하면서 지냈다. 조정에서는 근방에 집을 지어주고 이 곳을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송씨는 끝내 그 집에 들지 않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송비는 조석으로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을 향해 통곡을 했다. 곡소리 따라 마을 아낙네들은 곡소리 한 번 내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하였다. 그 동산은 동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남편을 그리워하던 봉우리란 뜻으로 동망봉(東望峰)이 되었다.
또 낙산의 집 뒤, 바위 면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란 글자가 새겨 있는데 그 옆으로 깊게 판 샘물이 있다. 정순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이곳에서 시비들과 옷감에 물을 들여 그 삯으로 삶을 이어가던 샘물이다.
한많은 일생을 살았던 송비. 중종16년(1521년 6월 4일)에 승하했을 때가 춘추 82세였다. 16살 때 단종과 헤어져 홀로 64년을 산 연인. 평생을 남편을 사모하며 살았다 하여 사릉(思陵)이라고 했다. 177년이 지나서야 중종은 일곱 명의 임금을 보며 산 그녀를 애처로이 여겨 대군부인의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했다. 왕후릉을 마련할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그녀는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시댁의 해주 정씨 묘역에 민간 신분으로 묻혔다. 사릉은 일 년에 두 차례씩 서로 다른 집안으로부터 제사를 받는다. 전주 이씨 집안과 해주 정씨 집안에서 지낸다. 묘역은 한눈에 봐도 명당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평생 사랑한 남편 곁에 가지 못하고 죽어서도 홀로 묻혔다. 세대를 잘못타고 난 것일까? 팔자일까? 가슴 밑바닥이 뜨거워지고 자꾸만 목이 멘다. 한 여인의 삶이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
여행포인트
○ 주소 :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산 65-1, 문의 : 031-573-8124, http://sareung.cha.go.kr
○ 자가용 : 남양주시 금곡동(금곡역, 금곡사거리)에서 진건, 사릉방향 2㎞ 지점. 또는 서울외곽도로 → 퇴계원IC → 46번 국도 → 사능IC교차로에서 우회전 → 사능
○ 대중교통 : 시내버스:청량리에서 165-3번 버스 이용. 길동에서 23번 버스. 금곡동에서는 77, 55, 7-7번 버스 이용.
○ 전철 : 상봉~춘천행 복선전철 이용해 사능역 하차. 길 건너 상기 버스로 환승. 사릉역:1544-7788(진건읍 진관리)
○ 맛집 : 사능쪽에는 콩서리(031-574-8729, 두추탕, 사능리), 숲속의 연못(031-529-9955, 고기류, 사능리), 고모네원조콩탕(031-573-7571, 콩탕, 송능리), 물맑은집(031-572-1444, 한정식, 진관리)가 있다.
■글-사진 : 이신화 http://www.sinhwa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