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나는 일이다

남강(南岡) 이승훈 (李昇薰, 1864~ 1930)은 평북 정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도 되기 전에 부모를 잃고 외롭게 자랐다. 그가 배운 것이라고는 겨우 3~4년 한문을 익힌 것이 전부였다. 그는 유기상(鍮器商) 점원으로 10여 년 동안 일하면서 타고난 근면성과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해서 국내 굴지의 ‘민족 기업가’로 우뚝 섰다. 그는 평양과 서울에 진출하여 무역업, 운수업까지 뛰어 들었으나 청일전쟁의 발발로 파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열정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1904년 일어난 러일 전쟁은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로 진출할 계획을 가졌던 그의 꿈을 또다시 좌절 시키고 말았다.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던 남강은 1907년 7월,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교육 진흥론’이라는 연설을 듣게 되었다. 그는 안창호의 “교육으로 백성을 일깨우지 않으면 독립도 있을 수 없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 안창호는 “민족이 망하면 아무 것도 소용없다, 민족을 살리기 위해선 개인의 자각, 청년 교육이 시급하다”고 설파했고 남강은 이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개인의 영달과 출세만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남강은 상투를 자르고 금주, 금연을 결행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민족정신을 깨우기 위한 학교를 세웠다. 그것이 유명한 오산학교(五山學校)였다.
처음 문을 연 오산학교는 7명의 학생이 전부였다. 하지만 남강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우는데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총,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7명의 학생밖에 없지만 차츰 자라나 70명, 700명에 이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일심협력하여 나라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처음 7명으로 시작한 오산학교는 이내 1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새로운 학문과 애국사상을 일깨우는 민족의 전당으로 변해갔다. 오산학교는 지식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남강은 1천여 평의 땅을 기증하여 ‘공동경작제’를 실시하면서 ‘이상촌 건설운동’을 벌여나갔다. 이상촌 건설 운동은 농지개량, 연료개량, 협동생산, 협동노동, 문맹퇴치 운동, 독서운동 등이었다. 남강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산 일대 7개 마을을 공동체로 조직해서 학교를 짓고 교회를 열고 병원과 도서관, 목욕탕을 건설해 나갔으나 일제는 그러한 공동체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남강은 1911년 105인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4년 넘게 옥고를 치러야 했고, 3·1 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여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22년 출옥한 남강은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계속했다.
한 사람이 심은 밀알이 얼마나 커다난 결실을 맺는 것인지 오산학교가 길러낸 인물을 보면 그저 놀랄 뿐이다. 오산학교는 고당 조만식,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다석 유영모, 함석헌, 목사 주기철, 한경직, 소설가 염상섭, 벽초 홍명희, 시인 김억, 김소월, 백석, 언론인 홍종인, 화가 이중섭 등 한국 근현대사에 이름을 새긴 쟁쟁한 인물들을 무수히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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