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자리란 무엇인가? 현재 세상에 퍼져 있는 좋은 일자리에 대한 정의는 ‘대학 졸업자에 걸 맞는 높은 임금을 주는 일자리’다. 이렇게 절대 평등주의에 입각한 포퓰리즘에 편승하는 좋은 일자리의 정의는 세상 어디에도 적용될 수 없다.
센달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열병처럼 번지는 것도, 절대평등을 ‘정의’로 개념화 하기를 원하는 욕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정의’는 규범적 개념으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다만, 고대 그리스부터 계속된 학자들의 연구로부터 경제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정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최저 임금이나 최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더 향상되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력에 대한 보상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서 가장 큰 문제는 타고난 능력이나 운이 너무 다른데서 발생하는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도 한 고등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아야

이러한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타고난 능력이나 운으로 많이 벌어들이는 사람에게 높은 세율을 부과해 국가가 강제적으로 소득 재분배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자들 스스로 타고난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에 물질과 재능을 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평등을 해결해 주는 이 두 가지 관점이 타고난 부와 능력으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에는 사회적 존경의 기준에 대해 확고하게 공유된 지식이 없다.
타고난 능력은 개인과 그 가족이 출세하고 권력, 물질적 행복을 누리는데 이용되고 있지만, 그런 사람이 고위직, 정치인, 유명인사로 존경의 대상이 된다면, 한국의 도덕적 기준이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도덕적 기준이 만연해 있으면, 한국의 양극화와 일자리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부가가치가 높은 좋은 일자리가 있지만 이는 전체 일자리에서 보면 소수다. 좋은 일자리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잘못된 도덕적 기준에 의해, 좋은 일자리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일자리를 포기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캥거루’ 족이 될 것이다.

근로자 생활 향상시켜야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양극화와 일자리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좋은 일자리의 정의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일 것이다. 노력에 대한 보상은 근로하는 시간만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시간 동안 얼마나 큰 부가가치를 창출했는가로 측정된다. 8시간 노동에서 낮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면 보상이 적을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발생되는 근로자간 보상의 차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체계적으로 마련해 나가는 것이 정치인과 대통령의 의무이고 책임이다.
맹목적인 무상급식보다 근로자들의 행복한 생애에 도움이 되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테면, 한국의 부모들에게 교육열은 의식주 보다 더 중요하다. 굶어도 자식 교육을 시키는 덕택에 한국경제가 이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생애 주기로 보면,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일자리의 공유지식을 만들려면, 정부와 국민은 세 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 우선 근로자의 자녀들이 높은 수준의 공적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낮은 임금에서 과외수업비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게 해야 한다. 두번째로 근로자들이 장기간 근로를 하면 주택 마련이 가능한 주택공급제도를 고안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장기간 근무하는 근로자들이 공적 연금수혜에서도 더 나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할 필요도 있다.
좋은 일자리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 ‘좋은 기업인’도 더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종욱
서울여대 교수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