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한 풍운아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만큼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오늘날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를 사실상 확립한 최고의 공로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편 철면피하고 잔인한 군사독재라는 오점을 남긴 지도자이기도 하다.
크롬웰은 영국 동부 헌팅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한 엘리트였다. 그는 의원자격을 얻었으나 일개 지주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가 최초로 군대에 가담했을 때는 43세의 비교적 많은 나이였다. 다시 영국은 찰스 1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11년간 의회 없이 정치를 하면서 의회파를 탄압했다.
찰스 1세와 의회는 타결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사태는 내전으로 치달았다. 1642년 가을 의회파와 왕당파가 무력으로 충돌하면서 크롬웰은 의회파에 가담했다. 크롬웰은 자신의 기병대를 모집하고 처음으로 군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군사기술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뛰어난 군사적 감각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군인들에게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격한 기율을 적용시켰다. 그는 항상 봉급날을 엄격히 지키면서 충분한 보수를 지급, 군대의 사기를 최고도로 유지하면서 항상 끊임없는 군사훈련과 강력한 지휘자 확보에 힘썼다.
처음 전투는 외국 용병들로 구성된 찰스 1세의 군대가 우세한 상황이었으나 최후의 승자는 크롬웰이었다. 전쟁초기 크롬웰은 일개 기병대의 장수에 지나지 않았으나 철기병(Ironsides, 鐵騎軍)’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잘 훈련된 기병대를 이끌고 백전백승을 이끌어내며 의회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던 크롬웰은 ‘신이 자신을 승리로 이끈다’고 굳게 믿었기에 과감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었고 마침내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정권을 잡은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왕정을 폐지했으며, 잉글랜드 연방으로 불린 공화정을 세웠다. 국왕 처형 후 얼마간 크롬웰은 왕당파 인사들을 규합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철권통치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크롬웰은 왕당파의 중심지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정벌해서 스코틀랜드에서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고 있던 찰스 2세를 격파하고 10년 동안 계속된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을 승리로 이끌고 청교도 혁명을 이룩했다
이후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종신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오르고 죽을 때까지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이 시기에 그는 귀족과 교회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재분배하고, 중등교육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대외적으로는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자메이카를 빼앗고 신흥강국으로 떠오르던 네덜란드를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여서 제압하고 해상권을 지배하는 업적을 세운다. 하지만 그는 왕당파의 거점이기도 했던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대한 침공과 학살을 저질렀다는 오명도 남긴다.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지만 크롬웰이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한 지도자였다는 것은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2002년 BBC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크롬웰은 영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10인 안에 들어갔다. 지금도 런던의 국회의사당(웨스트민스터 궁전)정문 앞에는 갑옷차림으로 검과 성서를 들고 있는 크롬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