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에게 휴가가 주어진다면 뭘 할까? 여러군데 주마간산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한곳에서 여유롭게 쉬면서 여행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현실은 바쁘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이미 갔다 온 곳이라도 재확인해봐야 한다. 한마디로 여유롭게 여행 즐기기는 직업인에게는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일종의 work hollic이다. 그런데 부곡온천에 갔다가 수질에 푹 빠져 버렸다. 내게 휴가가 주어진다면 1주일 정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부곡(釜谷)이라는 지명이 붙은 부곡리. 덕암산(德岩山:545m) 기슭에 자리한다. 그곳에 부곡온천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호텔, 모텔 등 숙소가 총 20여 곳이 흩어져 있다. 모두들 온천수를 이용하는데 집집마다 약간씩 수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부곡온천을 처음 개발해 2대가 대물림해오고 있는 원탕의 신기철 사장(52세)을 만났다. 온천단지에서 ‘원탕’이란 어쩌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사장의 말에 따르면 작고한 아버지 신현택옹이 최초 개발자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부곡면 거문리에 겨울눈이 바로 녹고 물이 따뜻하여 한겨울에도 빨래를 할 수 있는 샘물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1972년 6월부터 온천 굴착을 시작해 1972년 12월 28일 지하 63m지점에서 온천수가 솟아 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는 서울 상도동이 고향이고 당시 목욕탕을 운영했다. 아버지는 유황성분 입욕제를 만들어 특허를 낼 정도로 수질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직접 온천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국 온천공을 찾아다니게 되었고, 근 6~7년간 온천공 발굴에 힘을 바치다가 부곡온천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신사장에게 ‘최초 개발자인데 왜 주변 땅을 구입하지 않았느냐?’ 물었다. 온천공 발굴하러 다니느라 벌어 놓은 돈은 이미 바닥이 낳고 돈을 구하러 서울로 간 사이에 이미 소문이 나서 땅값도 오르고 사람들이 팔지도 않았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원탕이라는 건물 뒤 공원에는 최초의 발굴지가 있고 온천지 유래를 적은 기념비(1995년 9월23일)가 있다. 해마다 온천제를 여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면 부곡온천에 관련된 오래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을까? 부곡온천의 생성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의 영산현조에 ‘온천이 현의 동남쪽 17리에 있더니 지금은 폐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동국통감의 고려기에도 ‘영산온정’이 기록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온천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온정리)에 옴샘이라고 불렸던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우물이 있다는 소문이 전국에 전해지면서 옴 환자들과 나병 환자등 피부질환자들이 떼지어 와서 치료를 하였다고도 전해온다. 이곳은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고 1981년 온천지구지정,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 고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유황(Na-So4), 약알카리성의 수질은 둘째치고 놀라운 것은 온천수온이다. 최고수온이 78℃란다. 맨 처음에는 68도였으나 갈수록 수온이 높아지는 이유는 더 깊게 심층수를 뽑아내기 때문이다. 깊어질수록 수질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평가는 할 수 없다. 현재 온탕 이외에도 20여 곳이 넘는 곳이 숙박업을 운영하고 있다. 일일이 그 모든 곳을 체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세군데만 추천하자면 원탕이 있고 부곡하와이가 있다.
부곡하와이는 부곡온천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호텔, 사우나, 수영장, 놀이랜드, 동, 식물원, 서바이블장, 눈썰매장, 박제전시관, 워터파크, 노천온천탕인 스파니아, 사후의 공간 등을 갖추고 있는 사계절 놀이타운이다. 전량 온천수를 사용하고 관중이 있건 없건 공연이 펼쳐진다. 그러다보니 부곡온천하면 부곡하와이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이 사장이다. 문제점이라면 애시당초 시작된 워터파크가 아니라서 실내와 실외의 연계 동선이 길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군데가 로얄관광호텔이다. 최근에 리모델링해 객실이 깨끗하다. 그리고 수질의 빼어난 것은 주변사람들에게 이미 입소문 나 있다. 평범한 객실을 벗어나 가족이나 단체 등이 이용할 수 있게 시설을 잘 갖추고 있다.
부곡온천 근처에 18홀의 부곡 골프장이 있고 그 외 창녕에는 화왕산과 관룡사 말고도 볼거리들이 있다. 영산면의 만연교(보물 제564호, 동리 434)는 다리를 재정비해서 눈길을 확 끌게 만들었다. 정조4년(1780) 원님이 다리를 고쳐 주었다고 하여 院(원)다리라고도 한다. 만연교를 건너면 호국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더 위로 오르면 석빙고와 함박산 약수터가 있다.
그 외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내륙습지(231만㎡)로 1억 4000만년의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생태계의 보고인 우포늪이 있다. 생태관이 조성되어 있다. 날이 차가워지면 더 많은 철새들이 날아들 것이다.
또하나 이번 취재에서 알게 된 곳은 성씨 고가(대지면 석리)가다. 성씨 고가는 한눈에도 대부호였음을 알게 한다. 특히 이곳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거녀로 장남 김정남을 낳은 성혜림의 본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1937년 성유경과 김원주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으로 진학했다.
아버지 성유경은 1948년 혹은 한국 전쟁 무렵에 가족을 이끌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1951년 평양 제3여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했다. 김정일 총비서와 만나기 전에는 영화배우로 활약, 1955년에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했다. 성혜림은 김일성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김정일은 김일성이 내정한 조선로동당 간부의 딸 김영숙과 결혼했다. 김정일의 관심에서 멀어진 성혜림은 심한 우울증에 빠져 1974년 이후 소련 모스크바에서 요양하며 외롭게 살았다고 한다. 성혜림은 1996년 2월 언니 성혜랑과 성혜랑씨의 딸 이남옥등과 함께 신병 치료차 머물렀던 모스크바를 떠나 스위스로 나온 후 잠적했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2002년 5월 65세때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북한은 성혜림의 장례식에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성혜랑은 1996년 미국으로 망명해 살고 있다. 성혜랑이 망명하면서 김정남의 위상은 위협받기 시작했다.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은 대한민국에 망명해서 결혼해 거주하다가 암살되었다. 오빠 성일기는 성인이 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탈출했다.
창녕에는 그의 5촌 당숙 등 일가족이 거주하고 있다. 성씨 고택은 한국전쟁 때 절반가량이 소실됐으나 최근에 복원됐다. 이 마을은 우리나라 최초의 양파 재배지다. 성씨 가문은 전국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만석지기면서도 주위에 선행을 많이 베푼 적선가로 유명하다.

여행정보

○ 주소 : 부곡면 거문리 일원, http://bugok.cng.go.kr/main/default.asp
○ 찾아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 김천 JC → 중부내륙고속도로(마산방면) → 영산, 부곡 IC진입 → 부곡온천
○ 대중교통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하루 5차례 직행버스가 있다. 4시간 정도 걸린다. 기차는 밀양역에서 내려 시내버스로 밀양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 창녕방향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 추천 별미집 : 세연정(055-536-7674, 돌솥정식, 매운탕, 영산면 죽사리 376-1)이 맛있다. 그 외 공원숯불갈비(부곡면 거문리 221-9), 인동초한우식육식당(055-536-0012, 영산면 동리 242-6), 축협한우프라자(055-536-0475, 영산면 죽사리 324-1)등이 있다.
○ 숙박정보 : 로얄관광호텔(055-536-7300, 부곡면 거문리 215-1), 부곡하와이 관광호텔(055-536-6331~5, 부곡면 거문리 195-7), 원탕고운호텔(055-536-5655, 부곡면 거문리 217-11), 레이크 힐스 골프텔 부곡(055-536-5181~90, 부곡면 거문리 213-19) 등이 있다.

■이신화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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