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경영의 신‘왕융칭’

1931년 한 소년이 밀가루 부대를 잘라 만든 바지와 걸레를 기운 듯한 윗옷을 걸치고 부모를 떠나 타지로 향했다. 그 소년은 슬퍼하기는 커녕 오히려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집을 떠나는 아쉬움보다 이제 굶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왕융칭(1917~2008). 계열사만도 30개, 10만여명의 임직원을 두고 매출 750억달러(2010년 기준)을 올리고 있는 대만기업 포모사 그룹의 창업주이자, 대만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왕융칭 회장의 이야기이다.
왕융칭 회장은 1917년 타이베이현(臺北縣) 신디엔(新店)의 즈탄(直潭)이란 작은 마을에서 찻잎을 재배하는 아주 가난한 농가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눕는 바람에 왕회장은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토록 가난했던 한 소년가장이 9조원의 재산을 가진 부자가 될 수 이유는 무엇일까?

비결 1. 사소한 변화가 도약의 시작이다
비결 2. 철저한 자기관리와 검소함
비결 3. 돈은 어떻게 쓰는지가 중요하다

1931년 15세의 나이에 고향을 떠나 쌀가게에 취업했던 왕회장은 쌀을 들이는 법, 쌀값 계산법, 좋은 쌀을 고르는 법 등을 성실하게 배워 나갔다. 그리고 1년 후에는 사소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작은 쌀가게를 열었다. 당시 대만의 쌀가게는 쌀에 섞여 있는 돌을 골라내지 않은 채 그냥 판매했다.
그러나 왕회장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돌 없는 쌀 판매”라고 크게 써 붙여놓고 돌을 골라낸 쌀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최초로 ‘배달제’를 도입하였는데, 고객 가정의 식구수·식사량 등을 미리 파악해 쌀이 떨어지기 2~3일 전에 ‘알아서’ 쌀을 배달해주었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왕 회장은 자기관리에도 철저했다. 그는 평생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1시간가량 명상을 한 뒤 다시 1시간 동안 조깅을 했다고 한다. 또한 왕회장은 매우 검소했는데 그가 쓰는 수건은 30년 가까이 사용한 것이었으며 평소 단 다섯 벌의 양복을 수선해가며 아예 못 입게 될 때까지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회장은 주변을 돕는 일에 대해선 돈을 아끼지 않았다. 1963년 자신처럼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명지 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고, 1976년에는 20억타이완달러(약 740억원)를 쾌척해 비영리재단인 장경기념병원을 설립했다.
1980년과 1985년에는 중소기업과의 협력을 강조해온 왕회장의 뜻에 따라 중소기업의 책임자와 간부를 대상으로 포모사의 경영방식을 전수하는 연수지원센터도 설립했다.
맨손에서 시작해 세계적 기업을 일으켜 대만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아온 왕회장은 2008년 10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0일뒤 왕회장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무려 9조원에 달하는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백창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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