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갑산업의 역사를 쓰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창립 50주년 역사에는 경제발전, IMF, 글로벌 금융위기를 함께 겪으며 성장해 온 중소기업이 있었다. 중소기업뉴스는 중앙회와 같은 해에 태어나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함께 해온 중소기업을 탐방해 연재한다.

가죽장갑은 대표적인 겨울 선물 아이템 중 하나다. 따뜻하고, 편안한데다 가격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처럼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지만 불과 30~40년 전 가죽장갑은 비싼 몸값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때문에 장갑 하나를 살 때 꼼꼼히 따져보고 구입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죽장갑이 ㈜한영캉가루가 생산한 장갑이다. 가죽장갑의 불모지였던 1955년에 창업한 한영은 국내 업계 최초로 가죽장갑을 전문으로 생산하며 업계를 선도했다.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편안한 착용감으로 이른바 ‘캉가루표 장갑’으로 불리며 선물용으로 특히 인기였다.
이처럼 좋은 장갑을 생산할 수 있었던 비결은 창업주의 장인정신에서 비롯됐다. 창업주 고 강영일 회장은 보다 좋은 장갑을 만들기 위해 미군의 가죽 장갑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당시 우리나라보다 좋은 기술로 생산한 미군 장갑을 수십 개를 분석한 끝에 캉가루 만의 장갑을 만들어냈다. ‘자식이라면 못 할 일이 없는 한국의 부모’를 떠올리면서 자식을 품는 이미지의 ‘캉가루’로 이름도 지었다.
강 회장의 오랜 연구 끝에 미군 장갑 못지않은 장갑을 만들게 되자 점점 찾는 사람이 늘었다. 영업부를 따로 두지 않아도 전국의 도매상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던 한영의 위기는 예기치 못하게 찾아왔다. ‘강가루’라는 닉네임을 얻을 정도로 장갑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던 강 회장이 1983년 간경화로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이때 회사를 이어받은 사람이 장녀인 강혜숙 대표였다. 결혼 후 남편과 유학을 준비하던 때 회사를 맡게 된 강 대표는 빠른 시간 안에 회사를 추슬렀다. 어릴 때 놀이터고, 고등학교 예비고사를 준비하면서도 장갑 짝을 맞추던 장갑공장이 강 대표의 운명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위기는 금방 찾아왔다. 1988년부터 해외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캉가루’라는 국내 브랜드를 금쪽 같이 여기던 사람들이 차츰 떠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같이 일하던 사람도 장갑시장의 호황을 보고 직접 다른 공장을 차리기도 했다.
강 대표는 이 위기를 기술력으로 이겨내기로 마음먹었다. 30여 년간 가죽장갑만 생산한 그들만의 생산 노하우와 기술력으로 아버지처럼 좋은 장갑을 만드는 것이 경쟁력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블랙과 브라운이 대부분이던 시절, 가죽에 화려한 색을 도입했고, 적극적인 해외 공략도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한영은 품질검사가 까다롭고 절차가 복잡하기로 소문난 ‘GAP’에 수출을 성공했다. 이어 명품 브랜드인 ‘COACH’에도 납품을 시작하며 첫 해 400만 불을 달성한 후 매년 수출대상기업이 되었다. 이어 세계적인 패션의류 업체인 OLD NAVY, BANANA REPUBLIC, ECHO, BEMBERGER로 늘어나 1999년에 500만 불을 수출하고, 2001년에는 1000만 불을 돌파하는 성과를 냈다.
국내시장에서는 골프장갑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기존 가죽장갑에서 기능성을 강조한 제품으로 골프 대중화와 함께 안정적으로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50년이 넘는 동안 최고의 장갑을 통해 장인정신을 이어온 ㈜한영캉가루의 역사는 바로 살아있는 한국 장갑산업의 역사다. 이제 한영은 그동안 쌓아 온 풍부한 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국을 넘어 세계시장에 도전하며 글로벌 패션기업의 미래를 열 계획이다.
특히 수출과 내수를 50대 50으로 가져가며 세계 속에 장갑을 전문 생산하는 유명메이커로 우뚝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계획이다.
강 대표는 “앞으로는 보다 넓은 패션 액세서리 분야로 진출할 계획이다. 캉가루라는 이름의 기능성 장갑에서 벗어나 OEM방식이지만 2~3년 후엔 캉가루라는 이름의 아웃도어를 출시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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