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초, 아이폰 4 출시이후 성공가도를 질주하고 있었던 애플의 발목을 잡은 기업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대형 글로벌 경쟁업체가 아닌, 일본의 조그만 소재업체 ‘쿠레하(Kureha)’이다.
일반인에게는 식품용 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쿠레하는 리튬이온전지의 핵심소재, 폴리머의 세계시장점유율 70%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의 화학소재기업이다. 아이패드 같은 애플의 주요제품 대부분이 쿠레하가 만들어내는 폴리머 없이는 생산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2011년 3월, 갑작스런 대지진으로 쿠레하의 생산공장이 직격탄을 맞자 애플 역시 제품생산에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애플은 ‘5년 연속 공급망 관리 1위’ 기업으로 선정될 만큼 거래선 다원화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기업인데, 이런 애플이 일본의 중견부품기업 때문에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명이 있는 소재를 찾아라!’라는 쿠레하의 이와사키 사장의 신조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다. 폴리에틸렌이나 폴리프로필렌 같은 범용소재가 아니라, 특정고객에게 부가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독자적인 소재를 개발하는 데 주력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에 대하여, 쿠레하 역시 많은 일본기업들이 추진해온 ‘선택과 집중’을 실천하는 기업이라고 식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쿠레하는 몇 가지 점에서 기존의 ‘선택과 집중’ 전략과는 차별화된다.
우선, 강점 분야에 입각해 무모하게 분야를 확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보통의 ‘선택과 집중’이 단기적으로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유망사업이나 제품에 타겟을 맞추고, 그렇지 않은 사업이나 제품은 과감히 정리하는 것 이라면 쿠레하의 전략은 당장 눈에 띄는 용도가 없거나 시장이 작더라도 개발이나 판매를 중단하지 않고 큰 비즈니스로 성장할 때까지 몇 십 년이고 사업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기능이 정말로 뛰어난 소재라면, 언젠가는 유용한 비즈니스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쿠레하의 참을성이 빛을 발한 것이 바로 ‘Carbotron’이다. 1980년대 리튬이온전지의 마이너스극 재료로 사용되던 ‘Carbotron’은 가격경쟁력 면에서 흑연에게 밀려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말았다.하지만 최근 들어 전기차(EV)와 하이브리드자동차(HV)가 각광을 받으면서 30년 간 기술을 유지해온 쿠레하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안전성과 내구성 문제로 흑연이 아닌 30년 전에 개발된 Carbotron이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자동차의 리튬이온전지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사키 사장은 쿠레하의 이런 소재개발과 생산방식을 ‘농경민족형 제조’라고 말한다. 무모하게 토지를 옮기기보다는 한곳에 정착하고, 작물의 특성과 기능에 주목하는 농사꾼처럼 쿠레하 역시 화학소재 산업분야에 뿌리를 둔 채, 절대 제조노하우가 없는 분야로 무모하게 뛰어들지 않는다. 고객이 가치를 인정해주는 특기분야에 집중해 ‘수확’을 해내는 것이다. 이런 쿠레하의 제조방식은 일단 제품이 히트하게 되면 라이프사이클이 길기 때문에 차세대 제품이 개발될 때까지 필요한 경영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제조기술 측면에서 아주 높은 진입장벽을 구축할 수도 있다.
실제로 쿠레하는 수익이 날 때까지 심지어 40여년을 투자한 적도 있다. PVDF라는 소재가 그것이다. PVDF는 개발 당시만 하더라도 이렇다 할 용도가 없이 낚싯줄 정도에만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리튬이온전지의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 재료를 고정시키는 바인더에 PVDF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PVDF는 쿠레하가 폴리머 세계시장 점유율을 70%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안현섭
삼성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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