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초문을 열었다. 차갑고 썰렁한 이 계절 영월 땅을 찾는다. 평창과 정선의 끼인각인 영월은 오랜 세월동안 첩첩 오지 동네로 남아 있다. 선암마을(영월군 서면 옹정리 산180)의 한반도 지형을 보고 선돌(명승 제76호, 영월읍 방절리 산122)의 멋진 풍치를 바라본다. 여전히 잘 있었구나. 변함없는 아름다움에 감사하며 청령포(강원도 명승 제50호, 영월군 남면 광천리산 67-1)로 달려간다. 휘돌아치는 강 줄기가 에둘러 있는 소나무 숲, 청령포. 애닯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을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다. 가슴 한켠이 뭉신하게 아려온다.
계단을 내려가 배를 탄다. 청령포까지는 2~3분 거리. 그저 눈으로 보기엔 아름다운 강변 풍경이 있는 멋진 솔숲이지만 단종에겐 이곳은 ‘창살없는 감옥’이었다.
부인 정순왕후(당시 17세)와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영 이별하고 첩첩 산중인 영월로 유배 길에 오르게 된 해가 1457년 6월.
청령포는 지형부터 3면이 깊은 강물에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천길 절벽이 높이 솟아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대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을 만큼 소나무가 울창하다. 당시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현재는 그 솔숲에 단종이 머물렀다는 기와집과 초가집이 있다. 청령포의 소나무 숲은 대단히 멋진데 그중 관음송(국가지정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349호)이 있다. 높이가 30여m, 가슴높이 둘레가 6m나 되는 600년생 거목이다. 이 소나무는 처절한 단종의 유배생활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고, 피맺힌 울음소리를 들었을 터라 ‘관음송’이라 부른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에 왕방연 시조비가 있다. 청령포에서 바라보면 강건너 나루 왼쪽이다. 이 기념비는 단종에게 먹일 사약을 가지고 행차하였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의 죽음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새긴 시조의 새긴 비다. 구전돼오던 내용을 1617년 김지남이 한시로 지어 정착시켰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매년 4월 말이면 단종을 기리기 위한 단종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지난 2007년 4월 28일에는 영월군이 조선 27대 임금 가운데 유일하게 국장을 치르지 못한 단종의 승하 550년을 맞아 정조국장의궤의 반차도 및 세종장헌대왕실록을 근거로 전주이씨 대동종악원 전례이사의 감수와 집례로 국장을 치렀는데, 국장행렬 중 거리에서 노제를 봉행하고, 장릉에서 대나무와 한지로 만든 모형 말인 ‘죽인마’를 불태워 천도를 기원하기도 했었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작은 소나무인 정령송이다. 1999년 정순왕후가 모셔진 사릉에서 금강송 소나무를 가져와 단종이 모셔진 장릉에 심고, 그 소나무의 이름을 “정령송”이라 명명 하였다고 한다. 살아생전 동망봉에 올라 평생을 그리워하다 현재 사능에 묻혀 있는 정순왕후. 단종과 왕후가 543년만에 만나게 된 것은 그저 소나무 한 기뿐이다. 도대체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 할 수 없는 건 누구 때문이란 말인가?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이뤄질까?

사진은 청령포 선착장.

- 글·사진 이신화 http://www.sinhwada.com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