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회사 부장인 민영옥(43)씨는 며칠 전 대학 동문 송년회에 참석했다가 몹시 황당한 건배 구호를 들었다. 옆자리 선배가 잔을 높이 들더니 “성행위!” 하고 외쳤던 것. 민씨는 느닷없는 건배사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민망했다. 하지만 혼자만 당황스러워할 뿐 다른 사람들, 심지어 여자 동문들도 그 말을 받아 즐거운 표정으로 “성행위!” 라고 따라 소리치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 동기한테 ‘성행위’가 뭐냐고 묻자 “아줌마, 센스가 빵점이군”이라는 핀잔과 함께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의 줄임말이라고 귀띔했다.

#영화사 이사 정승원(44)씨는 회사 송년회를 앞두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도 울렁댄다. 멋진 건배사로 주인공이 돼야 하건만 머릿속에 맴도는 건 ‘위하여’뿐이다. 얼마 전 동창 모임에서 친구가 했던 건배사가 꽤 근사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사내에서 입담 좋고 센스만점으로 소문 난 후배는 뭔가 비장의 건배사가 있는 듯 여유를 부린다. 매년 건배사를 외칠 기회는 많은데 나만의 변변한 건배사 하나가 없다는 게 후회스럽다.

다사다난했던 2012년이 며칠 안 남았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로 어려움이 컸던 한해였던 만큼 마무리를 잘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기 위한 송년회 열기가 뜨겁다. 그런데 요즘 송년회 술자리에선 기발한 ‘건배사’들이 화젯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모임의 분위기를 돋우고 참석자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줄 통통 튀는 건배사를 알아본다.

당신멋져! 통통통!… 함께 외쳐볼까요
올해 최고 인기 구호인 ‘성행위’ 못지않게 ‘계나리’도 인기를 끄는 최첨단 구호다. ‘계나리’란 ‘계급장 떼고 나이는 잊고 리프레시(릴렉스)하자!’라는 뜻으로 기업 CEO들이 임직원과의 술자리에서 자주 외치고 있다. ‘당신멋져!’, ‘소녀시대’, ‘998824’도 상종가다. ‘당신멋져’는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며 살자!’라는 인생철학이 담겨 있어 어떤 모임에서든 잘 어울린다. K팝 열풍 속에 유명 걸그룹 이름을 본딴 ‘소녀시대’는 ‘소중한 여러분 시방 잔 대 보자’의 의미다. 나이 지긋한 50~70대들이 많이 쓰는 ‘9988(99세까지 팔팔하게 살자)’을 업그레이드한 ‘998824’는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틀만 아프고 죽자’라는 뜻으로 세대를 초월해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시대 흐름을 반영해 만들어진 건배구호도 있다. 올 한해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 잊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자는 의미에서 ‘오바마(오직 바라고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기를)’와 ‘너나잘해(너와 나의 잘나가는 새해를 위하여)’, ‘통통통(통∼의사소통! 통∼만사형통! 통∼운수대통! 통통통)’, ‘진달래(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 등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송년회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유머러스한 건배사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마돈나(마시고 돈내고 나가자)’, ‘마징가(마시자 징하게 갈 때까지)’, ‘거시기(거절 말고 시방부터 기막히게 보여주자)’, ‘오징어(오래오래 징그럽게 어울리자)’ 등이 대표적이다. 여성을 위한 구호도 빼놓을 수 없다. ‘1차만, 1가지 술로, 9시까지만’을 축약한 ‘119’와 함께 ‘남존여비(남자의 존재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다)’가 여성들이 많이 참석하는 송년회 모임에서 대박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외쳐 유명해진 건배 구호도 있다. ‘해당화’다. 몇 년 전 송년회 자리에서 현 회장은 “해당화에는 ‘해가 갈수록 당신과 화목하게’와 ‘해가 갈수록 당신만 보면 화가 나’ 두 가지 상반된 의미가 있다. 여러분과는 ‘해가 갈수록 당신과 화목하게’란 뜻으로 건배사를 외치고 싶다”며 잔을 부딪쳤다. 최근엔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살자’는 의미로 ‘해당화’를 외친다.

- 노경아 jsjy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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