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으로 여행을 간다면 으레 춘향이를 떠올릴 것이다.
요샌 지리산 둘레 길을 염두에 두고 여행을 떠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외에도 갈만한 곳은 많다.
하지만 이런 유명 여행지만 관심거리는 아니다. 남원에서도 소소한 매력이 물씬 나는 여행지가 있다.
바로 교룡산을 에둘러 싸고 있는 교룡산성과 산성 속에 선국사라는 천년고찰이 있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 … ‘교룡산성’
남원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옛부터 그 일대를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이 그칠 날이 없던 지역이었다. 그 흔적은 20여개의 산성으로 남아 보여준다. 교룡산(518m)의 교룡산성(전라북도기념물 제9호)도 그중 하나다. 이 성은 현재까지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어 한국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교룡산성까지 오르는 입구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찻길은 산성 석축을 볼 수 있는 곳까지 포장이 되어 있다. 잘 다듬어진 작은 돌로 담장처럼 쌓은 교룡산성. 촘촘히도 잘도 쌓았다. 교룡산의 동쪽 수구에 동문을 설치하고 산세에 따라 양쪽의 능선을 감싼 석축산성이다. 새로 복원한 성곽이지만 예사롭지 않음에 가슴이 설렌다.
그렇다면 교룡산성은 언제 쌓은 것일까? 삼국시대 백제가 축성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는 조선 초기에 이미 군창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곽은 교룡산 정상을 중심으로 양쪽 능선을 따라 남원 시가지 쪽으로 이어져 있다. 남원시에서는 서북방 지점이다. 성의 둘레는 3.1㎞ 정도이며, 높이는 약 4.5m다. 북쪽에 밀덕봉(518m), 복덕봉이 있어 험준했고, 서쪽도 험준했다.
산세가 매우 가파르고 계곡도 있어서 유사시 대피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지였다. 성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고, 별장청, 장대, 곡성창, 구례창, 염고, 장고, 군기, 산창 등 군사시설과 전쟁에 대비한 각종 저장고 등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 남원도호부 관내 운봉 장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했었다. 특이점은 성 안에 용천사(龍泉寺)라는 사찰이 있었다는 점이다. 성을 지키는 책임은 남원부사와 별장이었다.
교룡산성은 정유재란 때 파괴됐는데 1998년부터 복원 중이다. 현재는 동문에 홍예문과 옹성(甕城) 그리고 산중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원래는 4대문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 남, 북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문만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동문의 홍예문과 기역(ㄱ)자형의 옹성은 참으로 아름답다. 홍예문의 측면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고, 그 위, 평평한 곳에 아홉 개의 돌을 아치형으로 맞춘 것이다. 보기 드문 산성 석축 형태다. 성문 안 바로 북쪽에 교룡산성 중수비가 서 있고 별장, 장군등의 비각이 열지어 있다.

동학농민운동의 애잔함 …‘선국사’

그리고 산장 한 채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300m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선국사를 만난다.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창건 당시 절 근처에 용천이라는 샘이 있어서 절 이름을 용천사라 불렸다. 그후 교룡산성을 쌓은 뒤 절의 성격이 호국도량으로 바뀌면서 이름도 선국사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 이 사찰은 성을 지키는 본부로 쓰이기도 했다. 순조 3년(1803) 칠성각을 세웠고, 고종 28년(1891) 대웅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을 중건했고, 선국사가 한창 부흥했던 시절에는 승려들만 300여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웅전과 칠성각, 요사채 및 보제루만 남아 있다. 이 사찰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862년 농민항쟁 때, 경주에서 전라도 남원으로 피신했다. ‘사람이 한울’이라는 동학의 큰 이치를 깨닫고 널리 펼쳤지만 영남 지방에 만연한 사상의 보수성과 온갖 형태의 박해를 피해 전라도 땅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는 남원성 남문 밖의 한 주막에서 서공서(훗날 동학 신자가 된다)를 만나 그의 안내로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에 방을 얻는다. 최제우는 은적암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8개월여 동안 은거했다. 이곳에서 동학을 밝히는 ‘논학문’ 등을 집필했다.
최제우는 결국 1864년 체포됐고 대구 장대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그가 선국사 은적암에서 숨어 지낸 몇 개월이 결국 갑오년(1894)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동학농민운동가 김개남은 1864년 이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전라좌도를 통솔했다. 등산을 하고 싶다면 교룡산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다. 또 선국사에서 정상(0.55km)과 성터(0.43km)로 길이 나뉜다.

■여행정보
○ 주소 : 교룡산성, 남원시 산곡동 16-1
○ 문의 :남원시청 문화관광과 063-620-6172~3/선국사:산곡동 419, 063-625-7222
○ 찾아가는 길: 남원시내 → 전주 방면으로 난 17번 국도 이용 → 남원성, 만인의 총 → 교룡산 입구
○별미집
교룡산장(063-633-8867, 남원시 산곡동 393)에서는 직접 기른 토종닭 요리를 만들어낸다. 이곳 토박이가 운영한다. 오래전부터 산곡동에서 만들던 산성 닭은 임금께 올리는 진상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산성 엿은 지금도 산곡리의 특산물로 남아 있다. 그 외에는 남원시내를 이용하면 된다. 남원시내 광한루 옆 동네인 천거동에는 추어탕 잘하는 집이 다수 있다. 현식당(063-626-5163)이 독보적이다. 그외 새집(063-625-2443), 부산집(063-632-7823), 친절식당(063-625-5103)등이 있다.
또 가나안식당(063-632-0909, 한정식, 쌍교동), 우소보소(063-633-7484, 백반, 향교동), 선비고을(063-633-8932, 백반, 어현동)이 괜찮다. 특히 동춘헌(063-625-1731, 죽항동 205)은 중식당 전문으로, 놓치면 후회할 맛집이다. 한옥을 개조한 뜰아래(063-626-8338, 쌍교동 33)는 차 마시기 그만.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한다.
○ 주변 볼거리
남원시내에서 향교동으로 오는 길목에 남원성(사적 제298호, 동충동)을 만난다. 성곽은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으나 근년에 들어와 도시가 확장되면서 대부분 헐려 나갔으며 지금은 성곽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일찍부터 성곽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나 축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단 선조 30년(1597) 5월, 성을 크게 개축해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해 8월 정유재란때, 조명(朝明)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남원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조명연합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남원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만인의 총(사적 제102호, 063-290-6600, www.manin.go.kr, 향교동)은 당시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항전하다가 전사한 군관민을 합장한 무덤이다. 또 남원은 식도가 유명하다. 여자 대장장이가 있는 부흥식도(063-625-1275, 남원시 어현동 467-9)는 기억해둘 만하다.
○ 숙박
교룡산장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그 외에는 남원시내를 이용하면 된다.

■글·사진 : 이신화‘on the camino’ 저자, 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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