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성과주의의 재발견

보노보는 한때 ‘피그미 침팬지’라고 불리며 침팬지의 아종으로 분류됐던 영장류였으나, 최근에야 침팬지와는 다른 종임이 밝혀졌다.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생태적으로 두 종의 기질은 확연히 다르다.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침팬지는 경쟁, 이기심, 개인주의, 폭력을 상징하고, 보노보는 안정, 협력, 사회성, 평화를 상징한다.
영장류 연구의 1인자인 프란스 드 발은 인간의 내면에는 인류와 함께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침팬지와 보노보의 이미지가 공존한다고 말한다. 침팬지성과 보노보성의 조합 비율은 각 국가의 진화적 차이와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르다. 미국은 보노보 보다는 침팬지에 가깝다. ‘금전적 보상이 구성원의 조직 몰입도를 높인다’, ‘개인별 차등폭이 커야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 ‘등의 논리를 내세우는 미국식 성과주의는 다분히 침팬지적인 문화 코드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클로테르 라파이유는 직업에 대해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코드는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미국인에게 있어 직업은 곧 그 사람 자체이고 존재의 이유인 것이다. 그 때문에 개척정신의 뿌리가 강한 미국인들에게는 돈의 문화 코드는 부(富)가 아니라 자신이 이만큼 이뤄냈다는 것에 대한 증거다. 미국인들이 오로지 돈 자체에만 관심을 둔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해다.
미국식 성과주의는 개인의 정체성, 업적, 능력을 인정하고 보상하는 것이 조직의 성과를 높이기 위한 효과적 방법이고 그것이 또한 미국인들의 문화 코드와 정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개인 중심의 성과주의로 완성됐다.
반면 우리나라는 정(情)을 강조하는 사회로서 보노보적인 성향이 짙다. 만일 라파이유가 한국인들이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화 코드를 추출했다면, 아마도 그것은 ‘삶의 안정’이 아닐까? 돈의 문화 코드 역시 부 또는 업적에 대한 증거라기 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보험’의 의미를 갖는다.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취업 준비생들이 연봉보다도 안정성이 높은 정부기관, 공기업, 대기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여전히 크다.
진화적, 유전적, 문화적 배경이 침팬지에 가까운 나라를 답습해야 하는 ‘보노보 국가’가 어떤 혼란을 겪을지 상상해 보라. 그 혼란은 현재 여러 기업이 겪고 있는 미국식 성과주의의 폐해로 나타나고 있다. 협력의 상실, 상대적인 박탈감, 불필요한 내부경쟁, 단기성과 집중 등 그 폐해는 너무 많다.
다만 미국식 성과주의의 기초는 우리와 다른 진화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성립됐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답습은 지양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히 하자. “이데올로기와 인간 행동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공산주의가 붕괴된 것처럼, 소수의 물질적 행복을 위해 나머지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접하는 자본주의는 계속 지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프란스 드 발의 경고를 명심해야 한다.
한국형 성과주의를 정립하려면 우리는 늑대를 배워야 한다. 영어사전에서 ‘wolf’를 찾으면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이기적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과 다르다. 이기적인 동물의 대표로 알려져 있는 늑대는 실제로는 매우 이타적인 동물이다. 늑대가 순록처럼 자기보다 큰 동물을 사냥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강한 협력에 있다. 사냥에서 돌아온 늑대는 먹이를 게워 어미와 새끼, 병들거나 늙은 동료 늑대에게 먹인다. 사냥할 때는 응원하듯이 함께 울부짖는 소리를 내면서 단결을 도모한다.
무리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충성심과 협력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탁월한 성과를 창출하는 기업은 언제나 조직을 개인보다 우선하는 정책을 펴 왔다. 남성 의류 유통업체인 맨즈웨어하우스는 독보적으로 높은 성과를 내는 직원에게 불이익을 준다. 혼자 성과를 독점하고 동료와 협력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소기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개인의 특성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미국식 성과주의는 미국의 짧은 역사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문화적 배경은 보노보적이고 우리의 가치 있는 성과들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늑대 무리가 보여주는 협력과 상호작용으로부터 창출돼 왔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개인과 개인 사이의 상호작용과 집단의 창발성에 초점을 맞춘 한국형 성과주의를 정립해야 한다.

유정식(인퓨처컨설팅 대표/ 「착각하는 CEO」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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