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영부인 생가엔… 누군가 옛얘기 지줄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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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영부인 생가엔… 누군가 옛얘기 지줄대는 듯
  • 이신화 자유기고가
  • 호수 1966
  • 승인 2014.03.03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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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 시인 생가

뜬금없이 이 겨울, 왜 충북 옥천군으로 여행을 갔을까? 때로는 그 계절에 꼭 맞는 여행지가 아닌 곳도 찾을 때가 있다. 오히려 화려하지 않은 소읍 여행이 황금처럼 눈부시게 빛나지 않아도 매력적으로 가슴 한 켠을 깊숙이 채워낼 수 있으니 말이다. 옥천 주민들이나 관계자들조차, “이곳은 볼거리가 없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은 그만큼 보유하고 있는 관광자원이 적기 때문이다. 한발 뒤로 물러서 있는 듯해서, 옛 향기가 그대로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옥천군 구읍에는 시대를 거슬러 가는 듯한 느낌이 여실이 남아 있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맡다
옥천 나들목을 나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정지용 시인의 생가다. 구읍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마을엔 높은 건물은 없다. 70년대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의 오롯한 시골 동네. 소복하게 눈이 내려 온 천지가 하얗게 변했다. 나름 사람들이 찾는 듯, 화려하지 않은 식당이 골목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정지용 생가 앞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반쯤 열려진 사립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복원된 초가집이 있다. 현재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다른 집이 있었다가 1996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입춘대길’이라는 붓글씨가 걸려진 방안에는 시인이 살았던 당시를 재현해내고 있다. 마당 장독대에는 하얀 눈이 쌓이고 짚벼로 만든 이엉에도 고드름이 맺혔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도 머릿속에는 계속, 성악가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함께 부른 ‘향수’노래를 중얼거리게 된다. 어쩌면 시인을 가깝게 알게 된 것도 향수라는 가요 덕분일 것이다.
생가를 나와 문학관으로 간다. 문학관은 생가가 복원된 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5년에 세워졌다. 입구의 물레방아, 정지용 동상 등으로 꾸민 작은 공원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 문화해설사를 만난다.
정지용 시인은 부인과의 사이에서 3남1녀를 두었으나 차남과 3남은  6·25전쟁 중에 행방불명돼 장남 구관과 장녀 구원만 생존해 있었다. 그러다 2001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북에 있는 그의 셋째 아들 정구인이 아버지와 큰 형을 찾는다는 신청이 있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정구인은 51년 만에 큰 형과 누이동생을 만났다. 삼남은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는 말이 전해 오는데 상봉할 당시 아들 또한 아버지의 소식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이 어디서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단지 시인의 시집인 정지용 시집(시문학사, 1935), 백록담(문장사, 1941), 지용시선(을유문화사, 1946)과 소설 ‘三人’(서광, 1919)과 평론집인 ‘문학독본’(박문출판사, 1948), ‘산문’(동지사, 1949)등이 남아 시인의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육영수 여사의 ‘흔적’을 보다
구읍에는 육영수 여사의 생가(충청북도 기념물 123호)도 있다. 생가는 육 여사가 1925년에 태어나 1950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결혼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99칸이나 되는 고택이다. 원래 이 한옥은 1600년대 민씨, 김씨, 송씨의 가문에서 3정승이 거주해 삼정승의 집이라 불리던 곳. 조선 후기 양반집의 전형적 양식을 갖추고 있다. 고택은 1920년에 육영수 여사의 아버지인 육종관이 민정승의 자손 민대감에게서 사들였다고 한다.
생가는 육여사 서거 이후 폐가처럼 변해 1999년 완전 철거됐다. 이후 생가 터 상속권자가 옥천군에 부지를 기부했고 지난 2005년부터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건물은 웅대하나 오래 묵은 느낌이 없는 것은 그 이유다.
생가 안채로 들어서면 행랑채 뒤켠으로 안채가 있고 그 뒤켠에는 사당과 뒷채가 또 있다. 안채 뒤켠에는 육 여사의 살아생전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 걸려 있다. 99칸의 대갓집이지만 육 여사가 어릴 적 살던 방은 아주 비좁다. 마치 골방 같은 느낌이 드는 방이다. 방안에는 재봉틀, 다리미가 있고 옷을 넣는 문갑, 거기에 문방사우가 있는 책상 등이 있어 더욱 비좁게 느껴진다.
당시는 처첩제도가 인정되던 때다. 그러니 이 거택에 거주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사랑채는 또다른 부인이, 뒷채는 또 다른 부인이 있었다. 그렇다면 ‘육 여사 친정 아버지의 실제 자식은 몇 명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정확히 알 수 없다’였다. 이 집을 복원하기 위해 옥천군에서 사들였을때 33명의 인감이 필요했다’고 한다. 남겨진 정확한 자료도 없이 어찌 인생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저 상황을 돌려 짐작하는 수밖에. 육 여사의 친정 아버지가 궁금했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미 다 아는 육 여사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자면 정실부인 이경령 여사의 4자녀 중 둘째로 1925년 11월 29일에 태어났다. 고향 죽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뒤이어 서울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다시 옥천으로 내려와 옥천여자중학교의 교사생활을 했다.
1950년 10월 박정희 중령을 만나 12월12일에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 아버지 육종관은 결혼을 극구 반대했지만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박정희의 근무지였던 대구로 내려가 하숙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63년, 38세라는 최연소의 나이로 영부인의 지위에 올랐다. 1974년 8월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제 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청년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자녀로는 근혜, 서영(근영), 지만 1남2녀를 두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5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10.26사태)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을 맞아 서거했다.

■여행정보
충북 옥천구읍에는 한옥이 여러채 남아 있다. 서예가 김선기 씨의 집(1934년경)은 ‘마당 넓은 집’이라는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1944년 개교한 옥천여중의 교무실로 사용되던 ㄱ자형 한옥도 옛 멋을 최대한 살려 정갈하게 보수됐다. 그외 1856년경 지어진 ‘춘추민속관’을 비롯해 한식당 ‘아리랑’, 김기태 고택 등이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옥천 죽향초등학교가 있다. 1936년 지어진 죽향공립보통학교 교사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죽향초등학교 교정 오른쪽에 남아 있다. 현재는 교육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는 육영수여사 휘호탑, 정지용 시비, 죽향리사지삼층석탑이 있다.
○정지용 생가 :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1, 043-730-3588, 정지용 문학관:하계리 39, 043-733-6078/육영수 여사 생가: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옥천IC-구읍쪽으로 가면 된다.
○기차편 : 서울역(06시 15분~19시 40분)에서 1시간 2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2시간 10분정도 소요/버스편:동서울터미널에서 14시, 18시. 2시간 정도 소요. 대전까지 와서 시내버스 607번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추천 맛집 : 원조구읍할매묵집(043-732-1853)은 재료를 자연산을 이용하는 보기 드문 집이다. 또 대박집(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043-733-5788)은 금강 상류에 서식하는 민물고기를 갈아 넣고 된장과 고추장으로 육수를 낸 생선 국수와, 피라미를 프라이팬에 튀겨 고추장 양념을 발라 만든 도리뱅뱅이가 인기다. 그 외 고택을 이용하는 마당넓은집(043-733-6350), 식당 겸 민박을 치는 ‘춘추민속관’(043-733-4007) 등이 있다. 숙박은 군북면 대청호 주변과 금강변인 청성면 합금리 일대에 민박집들이 있으며 읍내에 ‘옥천관광호텔’(043-731-243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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