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시대 역대 임금들이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던 선농단.

일상 속 무심결에 먹는 음식에도 늘 유래가 있다. 흔히 먹는 음식의 유래를 찾아 떠나보는 여행도 재미 있다.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즐거움과 함께 맛을 음미하는 그 정도가 달라진다. 지역마다 제각각 특징이 다르다. 우선 서울 음식을 찾아보자. 서울 음식 중에서 설렁탕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 떠나본다. ‘설농(雪濃)’ 혹은 ‘설롱’이란 이름은 눈처럼 뽀얗다, 눈처럼 흰색깔이 짙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서울은 조선 시대 초기부터 500년 이상 도읍지여서 궁중 음식 문화가 발달돼 있다. 그중에서 설렁탕은 그 유래가 재미있다. 설렁탕의 유래를 찾기 위해 ‘선농단(先農壇)’을 찾는다. 현재 선농단은 동대문구 종암초등학교 바로 앞 골목에 공원으로 만들어져 있다. 최근 역사공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장 언덕 한 켠에는 500여년 된 향나무(천연기념물 제 240호)가 있고 바로 앞에 문인석 한 기가 남아 있다.
선농단은 어떤 곳이며 설렁탕의 유래가 왜 이곳에서 시작됐을까?
선농단은 조선 태조 때 설치됐다. 조선 시대 역대 임금들이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농경에 관계되는 ‘신농’과 ‘후직’을 주신으로 해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던 것. 매년 경칩 후 해일(亥日)에 선농제를 지내고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을 했다. ‘적전’이란 고려, 조선 시대 권농책으로 ‘국왕이 농경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의례용으로 설정한 토지’를 일컫는다.
적전이 설치된 것은 태조 때지만, 적전에서 처음으로 친경한 것은 성종 때다. 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한층 농경에 관심을 보인 성종은 적전에 나아가 직접 밭갈이를 해보고자 했다. 성종 6년(1475년)에 먼저 선농단에 나아가 적전제(籍田祭)를 올렸다. 적전제는 선농제라고도 하는데, 적전의례 중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친경이 행해지던 곳은 선농단에서 동남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전농동 (구)오스카극장 부근으로 그 면적은 약 100이랑이었다.
현재의 지명에도 이곳의 유래를 읽을 수 있다. 제기동(祭基洞)이라는 지명도 ‘제사를 지내던 터’라는 의미가 있다. 제기동 종암초등학교 사이의 나즈막한 고갯길을 ‘제터고개’라고 했다. 전농동 또한 조선시대 왕이 직접 경작하던 적전(일명 전농)이 있던 데서 유래됐다.
그렇다면 설렁탕과 선농단은 어떤 연유가 있을까? 홍선표가 쓴 ‘조선요리학’(1940년)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할 때 갑자기 심한 비가 내려서 촌보를 옮기지 못할 형편에다 배고픔에 못 견디어 친경 때 쓰던 농우를 잡아 맹물에 넣어 끓여서 먹으니 이것이 설농탕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또 다른 설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조(1724~1776) 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몽골어 사전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 따르면,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어 끓인 것을 ‘공탕(空湯)’이라 적고 ‘슈루’라 읽는다. 곰탕은 ‘空湯’에서, 설렁탕은 ‘슈루’에서 온 말이라고 봤으면 한다. 오늘날의 곰탕과 설렁탕은 동류이종일 따름이다. “몽골의 설렁탕은 대형 가마솥에 소 2마리, 양이나 염소 12마리를 통로 끓여 쇠고기를 잘게 썰어 소금을 넣고 끓인 ‘공탕’이다. 공탕은 전쟁터에서 군사(특히 기마병)들의 식사를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고려시대 우리 민족은 불교를 믿었고 육식을 금했다. 고려인들은 몽골인에게서 소를 잡는 법을 배웠고, 이 소로 음식 만드는 방법도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설렁탕이나 곰탕은 우리나라가 시초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원조가 뭐 그리 중요한가.
이렇게 시작된 설렁탕은 현재에까지도 이어진다. 특히 설렁탕은 인구가 많았던 서울(경성)다운 음식이었다. 특히 빠르고 간편하게 식사를 끝내고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노임 근로자가 서울에 다수 상주했던 것도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설렁탕은 특정 지역 특산물이 아닌, 서울 인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식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20년 전만해도 설렁탕에는 쇠고기의 온갖 부위들이 다 들어갔었다. 그래서 누린내가 심했다. 누린내는 내장, 쇠머리에서 특히 많이 난다. 1990년대에 들면서 이 부위를 뺀 설렁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사태에다 잡고기를 적당히 섞어 끓이는 방법도 등장했다. 소뼈도 사골만 쓰는 집이 생겼다. 설렁탕 맛이 점점 고급스럽게 변해가는 것이다.
참고로 설렁탕과 곰탕의 큰 차이는 ‘뼈’에 있다. 설렁탕은 뼈를 오랜 시간 고아낸 국물을 이용하지만 곰탕은 소고기가 주가 된다는 점이 다르다.

■Travel Info
주소│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274-1(제기역 1번 출구)
주변 볼거리│경동 약령시장, 청량리 청과물 시장(동대문구 제기동 635-35)이 인접해 있다. 경동 약령시장이 생기게 된 유래는 무엇일까?
  조선시대 가난하고 병든 백성들을 치료하고 구제하던 기관이었던 ‘보제원’이 제기동에 있었다. 거기에 1960년대 말 청량리역이 가까워 전국의 한약재와 한약상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현재 제기동과 용두동 일대에 걸쳐 약재 상가를 비롯해 한의원과 한약국 등 1000여 곳이 성업 중이다.
  전국 한약재 물동량의 약 70%가 이곳을 거쳐갈 만큼 시장의 규모가 크다. 골목마다 탕약 냄새가 진동한다. 매년 서울약령시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또 동대문구에서는 2006년에 한의약박물관을 열어 한의약 관련 고서 등 유물 420점과 한약재 350점을 전시하고 있다. 보제원의 모형과 한방 체험실, 휴게실 등을 갖추고 있다. 또 경동시장과 도로변 사이를 두고 청량리 청과물 시장이 있다. 1949년에 설립된 재래시장이다. 시장이 설립된 초기 점포는 약 250개였으며 서울에서 남대문시장 다음으로 큰 시장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후 다시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시장이 재건됐으나 1961년에 일어난 대형화재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화재를 복구하면서 재래식 상가들은 철거되고 1963년 2층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1992년에도 화재가 일어나 큰 피해를 업었다. 청과물 도매를 주로 하는 시장으로 명성이 높으며 68개 점포가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국에서 모여든 청과물의 도매는 새벽부터 거래가 시작된다.
주변 맛집│용두동 대광고 안암천 건너편 곰보추탕(02-928-5435)이 유명하다. 또 청량리에 있는 혜성칼국수(02-967-6918, 청량리동 50-18)가 괜찮다. 1968년에 개장한 연륜있는 집으로 멸치, 닭칼국수의 진 맛을 즐길 수 있다. 또 장수원(02-966-4720, 전농1동 620-9)도 연륜 깊다. 불고기와 갈비국등 고기요리 전문점이다. 양이 넉넉하고 깔끔하다.
설렁탕으로 유명한 맛집│100년을 이어 오고 있는 이문 설렁탕(02-733-6526, 종로구 견지동 88)이 있다. 또 서울 주교동의 ‘문화옥’ ‘보건옥’ 명동의 ‘미성옥’ ‘풍년옥’ 서울역 뒤 ‘중림장’도봉구의 ‘무수옥’ 마포의 ‘마포옥’과 ‘한양설농탕’ 관악구의 ‘삼미옥’ 등이 1950~80년까지 생긴 설렁탕 맛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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