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산 공민왕 사당·토정 이지함 생가 둘러보고 마포갈비로 저녁식사

▲ 공민왕 사당

서울 곳곳에는 많은 관심을 끌지 못한 문화유적들이 도심 빌딩이나 주택가 사이에 남아 있다. 긴 세월동안 주변이 변해, 이제 그 흔적을 찾기조차 어려운 곳에 꼭꼭 숨어 있다. 우연히 마포구 자료를 뒤적이다가 와우산 자락에 공민왕 사당이 있음을 발견한다. 공민왕 사당은 광흥창 역에서 찾아 가는 게 빠르다. 이곳은 아직은 개발의 바람을 뒤로 하고 있어 소시민들의 벽돌식 주택가의 소박한 동네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인의 꿈 속 공민왕…“내 사당을 만들라”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에서 공민왕 사당(등록문화재 제231, 마포구 창전동 42-17번지)까지는 10여분 정도 주택가 골목을 찾아 올라가야 한다. 정작 지하철역에는 팻말이 없어서 동네 주민에게 길을 물어봐야 한다. 사당을 찾아나서는 언덕 길에서 중국인 여대생 관광객을 만난다. 그녀가 찾는 곳은 ‘드라마 촬영지’였다.
최근에 이 지역이 드라마 촬영지로 이용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주민들은 알지 못한다. 관광객을 딱히 도와줄 방법이 없었기에 그녀에게 공민왕 사당을 보여주기로 한다.
공민왕 사당은 와우산 자락 밑에 있다. 사당 입구에 있는 180년 된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48호) 다섯그루가 남아 긴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곳에 사당이 만들어진 것에는 유래가 있다.
조선시대 초 서강 일대에 양곡 보관 창고를 지으려 할 때 동네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이곳에 당을 짓고 매년 제사 지낼 것을 계시했고 그래서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 전쟁 때 파괴된 것을 전쟁 직후 주민들이 새로 건축한 것.
사당과 광흥당이 있으며 주민들이 한때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이 남아 있다. 시화를 즐겼던 풍류 시인이자 화가였던 공민왕은 서강에서 자주 시회를 열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죽어서까지 노인의 꿈에 나타나 이곳에 사당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까?
담 벽면에는 해마다 향사를 지낸 사진이 걸려 있다. 필자는 함께 동행했던 중국 여대생에게 그림을 보여주면서 어설픈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이 두 사람은 서로 깊게 사랑을 했어. 공주는 너희 나라 사람이야. 그녀가 죽고 나자 왕은 ‘게이’가 됐어.” ‘게이’라는 말을 선뜻 못 알아듣던 그녀는 ‘서로 같은 남자’라고 반문하면서 ‘왜 그렇게 됐냐?고 묻는다. 어떻게 그 상황을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저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야’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사실 역사에 왜곡된 설명은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비록 원하는 드라마 촬영지는 보지 못했지만 한국의 역사 한 자락은 알고 가게 된 것이다. 사당 뒤편으로 이어져 있는 ‘마포구 걷고 싶은 길’인 와우산 산책로는 다음으로 일정을 미루고 지하철역사로 내려온다.

‘토정비결’의 창시자…이지함 선생 생가
용강동에 있는 정구중 가옥(서울특별시민속자료 제17호, 마포구 큰우물로2길 22)을 찾는다. 아파트와 주택밖에 눈에 띄지 않은 골목에 예사롭지 않은 한옥 한 채가 들어서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듯,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대문 앞에 안내 팻말만 있다.
구한말 용강동 부농 이모씨가 무남독녀에게 주기 위해 당시 장안에서 이름난 목수 안영달을 시켜 지었다고 한다. 대지 241평, 건평 17평의 ㅁ자집이다.
안채, 별채, 창고가 있으며 압록강 유역의 홍송과 백송을 뗏목으로 옮겨와 한강에 2년 뒀다가 1년 건조해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지었다고 한다. 좁은 공간에 별채까지 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이라지만 안을 살펴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곳을 비껴 토정 이지함(1517~1578)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어릴 적 새해가 되면 집집마다 ‘토정비결’을 보면서 한해의 운세를 점치곤 했다. 바로 그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 선생의 흔적이 멀지않은 곳에 있다.
그 흔적이라 함은 매우 빈약하다. 큰 대로변에 ‘내고장 역사 인물’하면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써 놓은 안내판이 전부다. 이지함은 ‘흙으로 언덕을 쌓아 아래로는 굴을 파고 위로는 정사(亭舍)를 지어 스스로 토정(土亭)이라 이름 하였다’(선조수정실록)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의약, 점, 천문, 지리, 음양, 술서 등에 모두 능한 그는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여러 가지 술서를 인용해 엮었다고 전해 온다.
실제로 저자가 아니라는 말도 전해오지만 여러 정황으로 그는 토정비결을 통해 민초들의 삶을 돌보고자 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1년 열두달의 신수를 판단하는 토정비결은 현세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굿판 뒤 화로에 굽던 고기…‘마포갈비’
길을 따라 내려오면 마포 갈비집이 연이어진다. 마포하면 왜 갈비가 유명해졌을까? 마포나루터가 그 기인이 된다. 마포나루는 조선 시대 서울 도성까지의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루터였다.
수운이 발달되던 그 시절, 서해에서 한강 하구를 거쳐 한양으로 들어오는 각종 물산들의 집결지였다. 많은 객주들과 어물, 곡물, 기타 물산들이 몰려 들었다. 으레 그렇듯이 배가 많은 곳에서는 굿을 펼쳤다. 마포나루 굿은 특히 유명하다.
매년 5월 단오 이전에 뱃사람들과 주민들은 마포나루의 안녕과 번영, 이곳을 드나드는 선박들의 무사항해를 위해 나루 굿을 실시했다. 굿은 육지에서 하는 나루 굿(대동제)과 배 안에서 하는 배 굿(용왕굿)으로 나눠 진행됐다. 이 굿이 마포갈비가 만들어진 연유가 된다. 굿판이 벌어지고 나면 으레 화로에 불을 지피고 석쇠에 고기를 구웠다. 그게 식당으로 발전됐다는 것이다.
또 일제시대 때 마포나루터에서 일하던 가난한 뱃사람들이 딱히 먹을 것이 없어 돼지등뼈에 붙어있는 고기를 긁어내 구워 소금에 찍어먹던 ‘등갈비’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전해온다. 1970년대부터 한강변이 가까운 용강동 일대에 하나둘씩 생겨난 고깃집들은 80년대에 최고 호황을 누렸다. 현대에서는 용강동에서 해마다 음식문화축제를 벌인다.

■여행정보
○찾아가는 방법
- 공민왕 사당 : 6호선 광흥창역 1번 출구 서강쌍용예가아파트 108동 옆
- 정구중 가옥 : 간선 7013A번 버스 이용해 용강동 주민센터 앞에 하차. 주민센터 바로 옆 골목길(삼성래미안 아파트쪽)로 가면 된다.
- 이지함 표지석 : 용강동 삼성 아파트 입구 도로변에 표시석 있음
- 마포 갈비 촌 : 마포역쪽으로 내려오면 도로변 옆으로 갈비촌을 형성하고 있다.
○별미집
갈비촌에서는 조박집(02-712-7462, 용강동 40-1)등을 비롯해 다수 있다. 또 염리초등학교 옆에 있는 갈스시(02-701-5847, 염리동 173-29)도 괜찮다. 또 을밀대(02-717-1922, 염리동 147-6)의 냉면도 맛있다. 그 외 역전회관(02-703-0019, 염리동 173-21)은 바싹불고기로 소문난 맛집이다. 그 외 마포역쪽에서는 원조 최대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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